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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일어났구나.”

 

매그너스가 깨어나 처음 들은 것은 그 목소리였다. 최초로 시야에 담은 것 역시 그 목소리의 주인이었다. 그는 자신이 태어난 이유를 알았다, 가슴 깊은 곳에 각인된 본능이 나를 따르라 종용했다. 그는 멍하니 자신의 두 손을 내려 보다가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사랑해.”

 

그게 그가 지금 살아 있는 이유였다.

 

 

르네는 지독한 여자였다, 마치 사랑에 지긋지긋하게 갈증 난 어린아이 같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완벽하고 온전한 형태의 사랑. 자신을 사랑해 줄 아름답고 위대한 피조물.

매그너스는 샤워가운을 걸친 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찬장 가득 빼곡하게 찬 유리병 안에 이상한 물체들이 빙글빙글 돌며 떠다니고 있었다.

르네는 말했다. “저건 영혼이야.” 영혼, 매그너스는 자신 역시 그것들 중 하나였단 것을 알았다. 그러나 별다른 감흥은 생기지 않았다. 영혼이라는 글자만을 입 안으로 몇 번 곱씹은 그는 벌어진 가운을 추스르며 앞서 걸어가는 르네의 뒤를 쫓았다.

매그너스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이제부터 자신이 어떻게 되느냐는 뻔한 질문조차 굳이 생각해내지 않고 사랑하는 창조주의 뒤를 쫓았다. 르네 역시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왜냐면 매그너스는 그렇게 만들어졌고 르네는 묻지 않으면 입을 다무는 이였기 때문이었다.

 

“자... 여기가 네 방이야.”

 

몹시 화려한 방이었다. 붉은 융단이 바닥을 덮을 듯이 깔려 있었다. 벽에는 직물로 짠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었고 천장에는 온갖 꽃의 그림이 피어나 있었다. 방의 중앙을 차지한 커다란 침대에는 캐노피가 벽처럼 늘어져 있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황금으로 된 장미가 조각된 거울이었다.

 

“은으로 만든 거지, 유리로 된 싸구려하고는 차원이 다른 거야.”

“아름답네.”

“그래, 네가 좋아했어.”

 

매그너스는 그 말에 달리 위화감을 느끼지 않았다. 맞아, 나는 그랬지, 하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는 거울로 다가가 황금 장미의 잎사귀를 어루만졌다, 아주 아름다웠다, 몹시 만족스러운 사치품. 그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다 거울으로 고개를 돌렸다, 목에 길게 난 흉터를 바라보자 흰 손이 싸늘하게 그것을 매만졌다.

 

“이건 네 영혼의 흔적이야.”

 

그럼 이것도 마찬가지일까. 그는 왼쪽 눈을 깊게 가른 흉터를 바라보았다. 몹시 낯익은 것이었다. 용을 닮은 날개도, 꼬리도, 뿔도 매우 이질적인 것이었다. 심지어 뿔은 한 쪽이 잘려 있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철저하게 설계된 키메라의 원형이었다, 르네가 실수할 리 없다, 그는 그렇게 단정지었다.

매그너스는 그 순간 무언가 깨달았다. 그러나 입을 다물었다. 르네는 부드럽게 그의 목을 감싸며 뒷머리에 이마를 기대었고, 매그너스는 다른 말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흰 손 위에 손을 얹었다.

 

“사랑해.”

“나도,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계속. 영원히.”

 

너에게는 영원이 없잖아, 르네는 작게 속삭이며 가운을 살짝 내려 매그너스의 맨어깨에 입술을 파묻었다. 부드럽고 작은 입술은 연신 얕은 숨을 내뱉고 있었다.

 

“......그래도.”

“응......”

 

매그너스는 가운을 조금 더 내렸다. 몸을 돌려 르네를 껴안은 채로 허리를 조인 띠를 풀었다.

 

 

“사랑해.”

“나도, 사랑해.”

 

걸신 들린 듯이 사랑을 요구한다, 그 요구에 끊임없이 대답하는 입도 혀도 명확히 그의 것이었다. 매그너스는 마치 주어진 것이 그것뿐이라는 듯이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몇 번을 속삭여도 아무런 의미 없겠지만.

계속해서 똑같은 말을 반복하다 르네는 잠에 들었다. 매그너스는 잠든 그를 내려다보다 깊게 고개 숙여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운 향기가 났다, 부드럽고 달콤한, 태운 듯한 쌉쌀함이 남는 향. 고개를 조금 떼면 청량하고 사랑스러운 사과 향이 난다. 귓가로 입술을 옮겨 짧게 입맞춤했다.

 

르네는 자신의 피조물에게 잠을 주지 않았다. 그는 그것이 왜인지 알았다. 매그너스는 어둑한 방 안의 거울을 들여다보며 남아 있는 흉터를 매만졌다. 벗은 몸 곳곳에 희미한 상처자국들이 남아 있었지만, 목에 있는 것만큼 큰 흉터는 없었다. 그는 뒷목을 더듬으며 얽힌 가시덩굴 같은 흉터를 손으로 훑었다. 잠시 그러다 눈가에 난 흉터를 매만지고, 이내 자고 있는 르네를 내려다보았다.

그와는 다르게 창조자에게 잠을 받은 르네는 색색 작은 숨을 내쉬며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예쁜 얼굴, 온갖 약물을 다루었는데도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손을 매만진다. 매그너스는 자신이 그것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손끝부터 발 아래까지, 가만히 쳐다보며 눈에 새기는 것, 희미하게 빛나는 듯이 보이는 하얀 뺨과 길게 늘어진 속눈썹을 그가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달의 축복을 받은 마녀의 얼굴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매그너스는 끈적끈적한 뺨을 손등으로 훔치며 고요하게 가라앉은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모든 것을 알았고 모든 일을 이해했다, 그리고 영원히 르네가 만족하는 일은 없으리라는 것도.

 

 

“피부가 짓물렀구나.”

“응.”

“괜찮아, 사랑해.”

“......사랑해.”

 

르네는 진물이 흐르는 뺨에 거즈를 붙였다. 그리고는 매그너스의 무릎에 앉아 목덜미에 가만히 기대었다. 좋은 향기가 났다.

 

“다음엔 더 잘 할게.”

“응.”

“사랑해.”

“나도, 사랑해.”

 

검은 머리칼을 매만지는 손끝은 감각이 둔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의 피부를 베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매그너스는 가만히 머리칼을 매만지다 눈을 내리깔았다.

 

“별이 예뻐.”

“응.”

“나랑 같이 봐 줘.”

“보고 있어, 지금.”

“나 사랑해?”

“응, 사랑해.”

 

 

르네는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잘 화내고 잘 토라지고 잘 웃었다. 그리고 그를 아주 많이 사랑했다. 어디까지나 과거의 이야기다.

 

매그너스는 그 때의 르네를 알고 있다. 그러나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는 그 사실을 기억하는 것만이 한계였다. 점점 많은 것이 납득으로만 남아 있고 어떤 것은 희미하게 속삭이는 본능으로만 답을 찾을 수 있는 일이 되었다. 르네는 언젠가부터 매그너스에게 하대하기 시작했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끊임없이 계속되는 말. 매그너스는 태엽 인형처럼 그것을 반복했다, 그의 심장이 뛰고 있는 한 끊임없이 해야 할 일이었다. 그는 그래서 만들어졌으니까.

르네는 자신을 사랑해 줄 피조물을 끊임없이 갈망한다. 자신만을 원하고 자신만을 갈망하여 그녀를 살아가게 할 존재를 갈망한다. 목마른 자가 호수를 찾듯이 결국에는 그녀의 손끝에서 만들어진 것은 그녀가 가장 사랑하던 이의 모습이었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가장 듣고 싶었을 말을 듣고 싶었을 목소리로 속삭이며, 매그너스는 하얀 뺨을 매만졌다. 르네는 가장 완전하고 온전한 이였다, 아름다운 얼굴과 달콤한 목소리, 언제까지나 팽팽한 살갗과 칼에 찔려도 두근거리는 붉은 심장. 불멸의 마녀. 그러나 그렇기 떄문에 모든 것은 르네와 함께하지 못했다, 누구든 세월 앞에 맥없이 부스러져 갔다. 르네가 할 수 있는 것은 지워진 흔적들을 모아 새 것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새벽 세 시, 커다란 솥에 짐승의 피와 뼛가루를 넣고 끓인다, 끓기 시작하면 개구리 알 으깬 것과 늑대의 털을 넣고 거품이 날 때 인간의 피부 조금과 손톱을 넣는다, 약의 위로 흰 표면이 생기면 파충류의 내장과 박쥐의 날개 한 쌍을 넣은 뒤 뱀의 독을 흘려 넣으며 잘 저어 준다, 재료들이 흐물흐물해지면 라즈베리와 쐐기풀 한 줌을 넣고 쐐기풀이 가라앉으면 새벽이슬을 맞은 장미 봉오리 열다섯 개를 넣는다. 솥 안의 것들이 끈적끈적한 액체가 될 때까지 끓이고는 불을 끈다. 약이 식기 전 인간의 영혼 스무 개를 넣고 달이 뜨는 방향으로 세 번 젓는다. 주재가 될 혼을 생물의 심장에 집어넣고 고깃덩이로 감싼다, 고깃덩이 심장을 짐승의 피로 적신 다음 약을 조금씩 부어가며 뭉쳐지는지 확인한다. 형상이 제대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면 남은 약을 모조리 부은 뒤 사역의 술로 육체와 혼을 구속해 떨어지지 않게 한다. 이 때 그것을 움직일 주재를 각인한다.

르네는 마도서를 읽어 주며 맥없는 눈을 했다. 르네는 영원히 온전한 존재였다, 그럼에도 더없이 무력했다. 매그너스는 르네가 만드는 작은 보석 같은 새들을 바라보며 팔을 긁었다. 몹시 아름다운 깃털과 사랑스러운 외형을 한 새들이었지만 고깃덩이와 깃털과 광물 따위로 만들어진 그것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맥없이 부서지리라. 그리고는 영영 돌아오지 않으리라.

그래도 르네는 그것을 날려보냈다, 작게 날갯짓하는 새들의 아름다운 깃이 아른아른 빛났다. 르네는 매그너스를 돌아보고는 팔에 붕대를 매어 주었다.

 

“다음에는 더 잘 할게.”

 

그건 입버릇 같은 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매그너스의 온 몸은 붕대 투성이가 되었다. 르네는 붕대를 갈 때마다 새처럼 말했다. “다음에는 더 잘 할게.” 이윽고 한 쪽 눈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르네는 그의 망가진 머리를 꼭 끌어안았다.

 

“이제 안 되겠다.”

“응.”

“미안해.”

“괜찮아, 사랑해.”

 

매그너스는 목덜미에 그려진 흉터를 손끝으로 더듬었다. 감각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르네는 그가 매만진 흉터에 입 맞춰 주고는 붕대를 풀었다. 은으로 된 칼날이 흰 손에서 날카롭게 빛났다.

르네는 사역마의 가슴에서 조심스럽게 심장을 꺼내들었다. 그것은 루비처럼 붉었고 여전히 아름다웠다. 르네는 새빨간 심장에 새빨간 입술로 입맞춤했다.

 

매그너스는 십 삼 년 전에 목이 잘려 죽었다. 살해의 충격은 생물을 자꾸만 죽음의 순간으로 되돌아가게 만든다, 그의 목에 그어진 선명한 흉터는 족쇄나 다름없었다.

르네는 목이 잘린 시신에서 심장과 혼을 꺼내 매그너스를 다시 만들었지만, 혼이 담긴 심장은 마법으로 만든 육체와 붙지 않고 겉돌듯이 혼자만 생생하게 빛났다. 혼이 고정되지 않은 육체는 조잡한 고깃덩이일 뿐이다, 그것은 쉽게 망가지고 쉽게 썩었다, 필사적으로 안식을 향해 기어가는 형상을 배반하며 르네는 계속해서 소생을 연습했다.

눈을 감은 얼굴이 싫었다. 마치 죽어버린 것만 같았다. 자신을 혼자 두고, 태초에 그러했듯이.

 

“사랑해.”

 

이번에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드디어 일어났구나.”

 

매그너스가 깨어나 처음 들은 것은 그 목소리였다. 최초로 시야에 담은 것 역시 그 목소리의 주인이었다. 그는 자신이 태어난 이유를 알았다, 가슴 깊은 곳에 각인된 본능이 나를 따르라 종용했다. 그는 멍하니 자신의 두 손을 내려 보다가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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