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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세 유럽 AU

 

 

빛이 들어오지 않는 그 숲에는 성이라고 하기엔 작고 저택이라고 하기엔 큰 묘한 생김새의 건물이 하나 있었다.

‘그 곳은 오래 전 감옥으로 쓰였던 건물이래.’ ‘아니야, 사실 부유한 귀족이 살던 곳이었는데 일족이 망한 후 버려졌다더라고.’ ‘다 틀려. 이미 멸망한 왕국의 왕족이 쓰던 피난처가 분명해.’ 숲 근처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저마다 건물에 대해 제각각의 의견을 내뱉었지만, 그 수많은 소문들 끝에는 늘 똑같은 한 마디가 붙었었다.

 

“어찌 되었든 다가가지 않는 게 좋아. 거긴 이제 괴물이 자리 잡고 있거든.”

 

앞 뒤 설명도 없이 ‘괴물’이라니. 참으로 호기심을 자극하기 좋은 애매모호한 단어가 아닌가. 철없는 아이들은 어른들이 말하는 그 괴물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자신들끼리 머리를 마주대고 새로운 소문을 만들어냈다.

 

“용 아닐까? 괴물하면 역시 용이지!”

“바보야, 용은 엄청 대단한 마물이라고. 단순히 괴물이라고 할 만큼 추하지도 않거든?”

“그럼 뭘까? 혹시, 팔이 8개 달린 곰 같은 건가?”

“털도 막 이만큼 많고!”

 

아무렇지 않게 무서운 가정을 하는 아이들이었지만, 정작 그 숲으로 가 직접 괴물의 정체를 확인하려는 자는 없었다. 호기심은 견디기 힘든 것이지만 목숨은 하나뿐이었고, 어른들이 매일 숲 근처를 순찰하는 탓에 아이들끼리 숲 근처에 다가가는 것 자체도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엄마가 그랬어, 무슨 괴물인지는 몰라도 그 괴물 때문에 묘지에도 못 간다더라. 그러니까 엄청 무섭게 생긴 괴물일거야.”

“묘지? 아, 영웅들이 잠들었다는 그곳?”

“응. 기껏 나라를 지키다 용감하게 전사했는데, 지금은 괴물 때문에 아무도 성묘하러 오지 않아서 슬퍼할 거라고 하시더라고.”

“영웅들은 불쌍하네. 아니다, 영웅들이 그 괴물을 무찔러 줄지도?”

 

까악. 까악. 아이의 말에 대답하는 건 커다란 까마귀였다.

듣기만 해도 불길한 울음소리에 떠들던 아이들은 일제히 하늘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성당의 지붕에 앉아 울고 있는 검은 새는 자신을 향하는 눈동자들을 찬찬히 둘러보더니,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날아올랐다.

‘무섭다.’ ‘무서워.’ ‘괴물이랑 한 패 인가봐!’ ‘저리 가!’

두려움과 흥미가 뒤섞인 아이들의 말을 뒤로하고 날아간 까마귀는, 한낮인데도 그림자만 가득한 숲 안으로 몸을 숨겼다.

 

 

 

“역시 아이들은 순수하지만 잔인해. 아니, 이 경우에는 나를 괴물로 만든 어른들이 더 잔인한가? 따지고 보면 괴물이긴 하지만. 그래도 너무하잖아.”

 

어둠에 잠긴 숲을 탑의 꼭대기에서 바라보던 묘령의 여인은 제 어깨에 착지한 까마귀를 보며 웃었다. 너무하다는 단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얼굴과 목소리였지만, 여인의 뒤에 서있던 남성은 진심으로 그녀의 말에 공감하는지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답했다.

 

“당신은 괴물이 아닙니다. 괴물은 그들입니다.”

“하하. 너무 그렇게 질색하지 마요, 제너럴. 사실 맞는 말이잖아요? 평범한 인간들에게 나 같은 마녀는 그냥 괴물일 테니까.”

 

까아악. 그녀의 말에 길게 운 까마귀는 수십 개의 깃털로 변해 흩어졌다.

사역마에게 건 마법을 푼 그녀는 제너럴이라 부른 남자를 향해 돌아섰다. 해가 들지 않는 곳인데도 선명하게 보이는 그의 모습은, 지금의 시대와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복식을 하고 있었다.

몇 십 년, 아니 족히 백 몇 년 정도 과거의 기사들이 입던 옷차림은 대단히 시대착오적으로 보이지만 이 성에서는 오히려 이 복장이 최신유행으로 보이기도 한다. 어느 시대의 옷인지도 모를 마녀의 복장에 비하면, 세월이라도 유추할 수 있는 남자의 옷은 그래도 현실감이 있었다.

 

“‘나 같은 마녀’라뇨,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면 그들은….”

“어허. 마법사들은 인간에게 자신들의 일을 밝혀선 안 되는 거 알잖아요? 속상한 건 알지만, 그런 말 마세요.”

“엔.”

“어우, 그렇게 부르면 제가 마음 약해지는 거 알면서.”

 

자신을 부르는 제너럴의 얼굴을 가볍게 쓰다듬은 마녀는 여전히 익살스러울 정도로 얄궂은 미소를 짓고 있다. 억지로 강한 척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에게는 정말로 이 모든 것이 그저 소꿉놀이같이 느껴져 웃을 수 있는 거겠지. 나이만 네 자릿수이며 거쳐 온 나라를 세자면 두 손으론 부족한 그녀다. 일반적인 인간은 물론, 일반적인 인간이 아니게 된 자신도 쉽게 이해할 순 없을 테지.

 

“인간은 아무것도 모르고 살다 가는 편이 좋아요. 골치 아픈 일은 오래 사는 우리 전문이니까. 그런 면에서 제너럴에겐 늘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내 제안이긴 했어도 두 번이나 삶을 살게 해서.”

“망령이 되어 이 숲의 마물이 되는 것 보다는 훨씬 행복합니다. 무엇보다 당신을 만난 것 자체가 제겐 행운이니까요.”

 

그는 자신의 뺨 위에 머무르고 있는 창백한 손을 마주잡았다. 여러 가지 약품냄새가 풍기는 그녀의 손은 변함없이 따뜻해서, 제너럴은 문득 이 마녀와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리게 되었다.

 

‘와, 버려진 묘지는 여럿 보았지만 여기는 너무한 걸? 얼마나 내버려 두고 산거람?’

 

지금으로부터 약 50년 전. 불쑥 자신과 제 동료들이 잠들어있는 묘지에 나타난 그녀는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한탄하듯 그리 외쳤었다. ‘나라를 구한 영웅들에게 이래도 되는 거야?’ ‘아무리 관리하기 귀찮다고 해도, 숲에 괴물이 산다는 거짓말 같은 걸 하면서 안 올 핑계나 만들다니.’ ‘덕분에 말이 씨가 되어서, 이 모양이 되었잖아?’ 대답해 줄 상대도 없는데 혼자 중얼중얼 이야기 하는 그녀는 어두운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묘비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고, 이윽고 자신의 묘비 앞에 발을 멈추었다.

 

“누구십니까?”

“…응? 아. 아직 정신이 멀쩡한 유령도 있었구나. 다들 악령이 되어버린 것 같아서 전부 처리하고 떠날 생각이었는데, 이것 참.”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저희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겁니까?”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서 한동안은 칭송과 보호를 받았지만, 세월이 흐르자 번거롭고 돈이 든다는 이유로 버림받은 이의 영혼이 어찌 멀쩡할 수 있겠는가. 제너럴은 다소 날선 반응으로 그녀에게 따졌고, 그녀는 눈썹 하나 까딱 않고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에소루엔. 인간들이 흔히 말하는 마법사고, 이 나라가 생기기 전 존재했던 왕국에서는 나를 붉은 땅의 마녀라 불렀지. 여기 온 이유는 당신들 때문이야. 아, 당신들이 나쁘다는 건 아니고. 마을사람들이 이상한 소문을 퍼뜨려서 당신들을 돌보려 하지 않은 탓에, 정말로 이 숲에 나쁜 기운이 모이고 이상현상이 생겨났거든.”

“이상현상? 그러면, 모두가 악령이 된 것도….”

“그래. 다 숲에 퍼진 악의 때문이야. 인간들은 잘 모르겠지. 말이 모이면 저주가 된다는 것을. 그래도 이 상황에서도 당신은 아직 이성을 유지하고 있구나. 다행이라고 할까?”

 

‘하지만 이대로라면 당신도 곧 저렇게 될 거야.’ 자수정 같은 두 눈을 빛내며 묘비를 쓰다듬은 마녀는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당신이 어둠에 물들지 않게 보호해 줄게. 나의 하인이 되지 않겠어? 하인이라고 해도 사역마일 뿐, 시종의 일은 시키진 않을 거야. 굳이 따지자면 호위기사 역이나 해주면 좋겠네. 이 땅을 지킨 영웅들을 이끌던, 장군의 칭호를 지니고 있는 당신이라면 호위기사 역 같은 것도 어울릴 것 같고.”

 

마녀의 제안은 다소 위험해 보였지만, 이제는 일개 유령일 뿐인 그에겐 선택지가 없었다. 소중한 동료들은 모두 망령이 되어 숲에 가득퍼진 어둠속으로 흩어졌고, 자신도 곧 이성을 잃고 저렇게 된다면….

 

“…좋습니다. 되어드리겠습니다.”

“좋아. 후후, 잘 됐네. 나 혼자 이 숲을 돌아다니기엔 힘들 것 같았는데. 좋은 아군이 생겼어…. 아, 나에 대해선 편하게 불러줘도 좋아요. 나는 사역마랑 마법사가 너무 수직적인 관계인 건 별로거든요. 마법사와 사역마가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는 게 내 지론이라.”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제너럴.’ 정중하게 인사하며 제 혼을 묘비에서 걷어내는 그녀의 모습은, 빛이 없는 숲속에서도 유난히 밝게 보였었다.

그렇게 우연히 두 번째 생을 얻은 제너럴은 제 주인의 곁에서 자신을 버린 나라와 마을을 지켰다. 제 동료였던 자들이 밝은 곳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숲의 어둠이 유지되게 돕고, 저주로 미쳐버린 짐승들을 베며, 충실하고 다정한, ‘붉은 땅의 마녀’의 사역마이자 기사로서.

 

“이 숲을 원래대로 되돌리고 다른 곳으로 떠나게 되어도, 엔은 저를 계속 곁에 두어주실 겁니까?”

 

부드럽게 잡고 있던 손을 놓은 제너럴이 물었다. 마녀는 고민하지도 않고 대답했다.

 

“물론이죠. 한번 사역마로 만든 상대를 그냥 내버려 둘 순 없는걸요? 지금 제 밑에 사역마들도 다 내가 해결한 땅에서 주워온 아이들이고 말이죠. 그러니 제너럴도 마찬가지로 곁에 둘 거예요. 물론 제너럴이 원한다면 묘지로 되돌려 보내주겠지만.”

“아뇨, 사양하겠습니다. 저는 당신 곁에 있고 싶으니까요.”

“이런 괴짜 마녀가 어디가 좋아서 이러시는 걸까. 영웅들의 장군님은, 하하하.”

 

자신과 전혀 관계도 없는 인간들을 위해 실체도 없는 괴물을 자처하는 당신을, 기사도를 가진 자로서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어렵사리 삼킨 제너럴은 아래층으로 향하는 그녀의 뒤를 조용히 따라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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