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의 런던은 오늘도 비가 내렸다. 태풍처럼 시원스레 내리지 않고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뚫고 마차가 거리를 지났다. 새까만 말이 끄는 마차는 이따금 채찍질하는 마부의 복장만큼이나 세련된 모양새였다. 어느 지체 높은 인물이라도 타고 있는 걸까, 거리를 지나던 인부는 호기심에 잠시 달려가는 마차를 보았으나 얼핏 스쳐 지나간 마차의 창에는 커튼이 쳐져 있었다. 분칠한 귀부인의 얼굴이나 기대했는데, 별 것 없군. 작게 투덜거린 인부가 제 바지에 튄 진흙을 대충 털어내고 다시 제 갈 길을 갔다.
비가 고여 진흙탕이 된 거리를 지나던 마차가 이윽고 어느 낡은 건물 앞에 멈춰섰다. 말을 달랜 마부가 잽싸게 마부석에서 뛰어내려 우산을 펼치고 마차의 문을 열었다. 탑 해트에 귀한 정장을 차려 입은 남자가 거리에 내려섰다. 마부가 씌워준 우산을 받아 들었으나 손이 맞닿는 일은 없었다. 그는 물러나라 손짓했고 마부는 고개를 조아리며 그가 지나가길 기다렸다.
남자는 높은 출신의 신사임이 분명한 외모였다. 햇빛을 본 적이 있기는 한지, 귀하게 자란 이라는 걸 숨길 수 없을 이마는 창백하고 높다. 앓은 흔적이나 사마귀 하나 없이 하얗고 말간 이마. 그 아래로 움푹 파인 녹색 눈이 무심하게 낡은 문을 훑어보았다. 긴 체구만큼 하얗고 길다란 손을 뻗어 뱀이 새겨진 녹커를 쥐고는 탕탕, 두 번 두드려 제 방문을 알렸다. 문은 이윽고 열려, 남자는 긴 몸을 문 안으로 숨기듯 안으로 들어섰다.
비에 젖은 오버 코트를 벗었을 때 즈음 보이지 않는 시종의 발소리가 다가왔다. 로키 오딘슨은 당황하는 일 없이 우아한 손속으로 제 코트를 허공을 향해 내밀었고 손을 놓았을 때 코트는 볼품없이 바닥에 추락하는 일이 없었다. 고맙네. 짧게 미소하자 코트를 든 시종이 몸을 숙이는 듯 하였다.
“주인님을 뵈러 오셨습니까? 주인님은 오늘도 2층의 고서재에 계십니다, 마스터 라우페이슨.”
하하, 마른 소리로 웃은 남자가 알았네. 다시금 물러나라는 명을 내렸다. 그는 손님이라기엔 이 집에 너무 익숙해졌고, 그녀의 보이지 않는 시종들은 그, 타지에서 흘러 들어온 귀족의 존재를 경계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로키는 그들의 눈에는 여즉 어린 존재였기에. 경외하지는 않았으나 무시하지는 않았다. 아주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으나 용서하지 못할 것은 아녔다.
2층의 서재는 이 낡은 건축물 중에서도 가장 낡은 방이었다. 반쯤 열린 문을 시종이 두드리자 들어오란 목소리가 잔잔히 울렸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문이 열렸다. 몇 년이 지나도록 로키는 이 방에 들어설 때마다 미약한 감동과 먹먹한 낯익음을 느꼈다. 그리고 아이보리색 종이 위를 가로지르는 펜 촉의 소리, 그것이 이 방을 적막하게 만들지 않았다. 창문을 등진 의자에 앉은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마스터 로키, 무슨 일로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파리한 얼굴은 반갑다는 표정 하나 없이 밋밋한 질문을 내었다. 로키는 제 표정을 가다듬었다.
“전에 말한 웨일스의 인어 건으로 찾아왔는데 말이지. 너무 바쁜 날에 찾아온 건가?”
손에 깃펜을 든 채 잠시 그를 보던 여자가 잠시 회색 눈을 굴리다 펜을 펜대에 꽂았다. 그녀는 제 건너편에 앉으라며 손짓을 했다. 문가에서 그녀의 허가를 기다리던 로키는 금방 방의 절반을 가로질러와 의자에 자리잡았다. 서재의 책상에는 채 정리되지 않은 서적과 문서가 어질러져 있었다.
“그렇다쳐도 언제나 바쁜 것 같군. 흡혈귀처럼 잠을 잘 필요가 없는 족속이면 더 일처리가 바쁠 거라 생각했는데.”
흡혈귀. 툭 던진 말이 방의 적막을 한 번 두드렸다. 여자는 잠잠한 표정으로 그를 보다가는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놓인 책장에서 가죽 수첩을 꺼냈다. 수첩에는 고풍스러운, 혹은 구식의 글자가 ‘인어’라 새겨져 있었다. 여자의 손이 스치자 반질한 음각의 글씨가 잠시 빛을 내는 것만 같았다. 아마 눈의 착각이 아니겠지. 로키는 그녀가 수첩을 펼치고 다시금 펜을 잡는 것을 흘깃 보았다.
오늘은 사소한 얘기를 나눌 여유 같은 건 없어 보이는 군. 조금 더 골려줄까 생각하던 것도 잠시, 로키는 긴 이야기에 대비하여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흡혈귀이자 비밀의 관리인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시간이었다.
이야기가 끝난 것은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서서히 멈추고 창문에서 흘러 들어오는 빛에 난색이 섞였을 때 즈음이었다. 긴 이야기를 해서인지, 입 안이 마르는 느낌이 들어 이미 식은 찻물을 한모금 넘겼다. 여자는 분주히 기록을 이어나가다, 로키를 한 번 올려다 보았다.
“매번 감사합니다,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닐 텐데.”
“오, 별말씀을. 이건 내가 계승 받은 의무니까 말이야. 아무렴, 달게 받아 들여야지.”
슬쩍 비꼬는 말에 여자는 잠깐 입술을 오므렸다가, 옅은 웃음을 지었다. 비웃음은 아니고 약간의 호의였을까. 로키는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예, 그것이 이 세계의 뒷면을 보살필 당신의 의무이지요. 여자는 그저 잠잠할 뿐이었다.
런던은, 이 세계에는 뒷면이 있다고 하였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서재에 나타난 여자가 그에게 속삭인 말이었다. 이를 볼 수 있는 인물은 드물고도 귀합니다.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가 그런 인물이 되겠습니다. 꼭집어 자신과 아버지를 연결 짓는 말에 기뻐했던 것도 같다.
북쪽에서 내려온 왕족의 후예, 북유럽의 왕가와 긴밀히 연결된 오딘슨 가는 로키의 전부였으며 그의 미래였다. 단순히 멋부리는 의미에서 고귀한 자가 아녔다. 그들의 피는 고매했으며 어떠한 이도 그들의 힘을 의심할 수 없었다. 권력, 부, 명예. 헤라가 약속한 축복 속에서 자라며 로키가 지배자로서의 꿈을 꾼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3살 위의 형, 토르가 있었으나 아버지는 후계자의 자리를 공석으로 남겨두었다. 신사란 무릇 섣불리 행동해서는 안된다면서, 말이다.
여자와 만난 것은 30년이 다 되어가는 과거의 일이다. 당시 정정하던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찾아오는 인물들은 수도 없이 많았으나 젊은 여자가, 그것도 아버지의 서재에 들어갈 수 있단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새로운 손님에 호기심이 자극된 토르가 로키와 함께 가정교사의 감시에서 재빠르게 벗어난 건 놀랍지도 않은 일이다.
멀리서 본 여자는 하얗고 말랐다. 걸음거리가 살짝 느렸으나, 그건 숙녀의 교양으로 유지하는 속도가 아닐까 생각할 수 있었을 텐데. 아버지의 서재 문 밖에서 이야기를 엿 들으려다 벌컥 열린 문에 놀라 넘어졌을 때, 처음으로 눈이 마주쳤다.
엷은 색의 회색 눈, 그것 외에는 특별한 곳이 없는 여자. 정장도 화려하게 차려입은 것이 아닌 수수한 옷인 것이 묘했다. 아버지는 잘 되었다는 듯 그들 형제를 들어오게 하였고, 여자는 연기 같은 눈으로 로키를 관찰하고 있었다.
몇 년 후, 그를 지목해 이야기를 들려준 것은 레아 애스터였다. 흡혈귀이자 비현실적인 세상의 기록자. 얼마나 오래 살아왔는지는 알 수 없다. 그녀를 보아온 30년 간 변화한 것은 하나도 없다고 단언할 수 있었으니까. 레아는 여전한 얼굴로 책상 위를 얼추 정리하더니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이 여자가 어떻게 생존해왔는지, 아직 로키는 그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몇 년 전, 이런 만남에서 한 번 즈음 물었던 기억은 있다. 인간의 피를 원할 때는 어찌하냐며.
싱거운 반응이 돌아왔다. 적어도 당신의 피를 바라는 일은 없다며, 잇새로 한숨을 푸시시. 내쉬는 것이었다. 그 외에는 자신에 대해 알려주지 않으려 했다. 오, 물론 그에게도 나름의 가설은 있었다. 흡혈귀가 피 없이 생존하는 것은 불가능이라 들었고 쇠퇴하는 일 없이 존재하는 여자. 권력층과의 긴밀한 관계를 맺는 여자가 피를 얻을 수 있는 방도는 많았다.
여자가 다시 입을 열어 적막을 끊었다. 그는 찻잔을 다시 받침대 위에 올려두었다.
“웨일스의 인어는 그러면 보류 상태로 넘기는 게 옳은 판단이라 생각합니다. 그 비호자도 평범한 인물은 아니니 함부로 손대는 것도 손실이 될 거라 생각한 건가요?”
“그것도 있지만, 굳이 놔둬서 나쁜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한 거지.”
여자가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그의 입에서는 나오지 않을 법한 발언이긴 하다. 로키는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육지로 올라온 인어가 사람을 잡아먹는 것도 아니고, 피를 빠는 것도 아닌데. 무엇이 문제겠어?”
“허나, 선례를 살피면..”
“과거에만 얽매여서는 안되지.”
이를 드러내지 않을 선에서 웃으며, 포만감을 표했다. 단순히 선의해서 한 행동은 아닐 거라 눈치챈 건지 레아가 살짝 눈을 옆으로 굴렸다가는 책을 덮었다.
“그렇지만 인간이 되기 위해 불멸을 포기했다는 점에서는 감탄 했어.”
“예, 힘든 결정이었겠죠.”
“그런 레아, 너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이는군.”
“제가 택할 수 있는 선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답을 내린 후 덤덤한 얼굴, 그 얼굴이 심기에 거슬린다 느낀 건 한 두 번 있던 일이 아니다. 오랜 세월 살아 왔다느니, 이 왕국만큼 오래된 삶을 살았느니. 그런 말은 여러 번 들었으나 이런 식으로 나오면 깨트려보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다. 상처 하나 받지 않을 것처럼 먼 눈을 하고서는, 저의 비꼼에 지친다는 듯 반응하는 것 또한 많이 보아왔다.
불멸을 사는 흡혈귀, 그는 가지지 못한 이능을 손에 넣었으나 어쩐 이유에선지 인간의 발 밑으로 내려와 그를 돕겠다 말한다. 그 전부가 거슬리고, 때로는 유쾌하지 않다.
7년 전, 그를 돕겠다고 제안한 후로 레아는 아무것도 내비치려 하지 않았다. 미련인가 싶어 로키는 조금 비웃고 싶어졌다. 다만 소리내어 웃지는 않았고, 그래. 질문 하나 정도면 될까.
그리하여 로키가 물었다.
흡혈귀. 영원을 내다보는 삶은 어떤가?
여자는 마땅한 대답을 내주지 않았다. 마치 그가 그 말을 꺼내지 않은 것처럼 매끄러운 낯으로 펜 촉을 잉크병에 담갔을 뿐이다. 손짓하여 문을 열고, 이제 갈 시간이 되었습니다. 마스터 로키. 그 말이 평소보다 조금 빨리 나온 것이 어떤 변화를 의미하는 것일까 생각하며 로키는 오래된 서재에 등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