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악마에게 있어 식욕 이외의 사랑의 방식이 존재하는가?
2.
이상해요, 이럴 리가 없어요, 이렇게 사랑하는데.
나이 든 대악마가 살려낸 인간의 딸은 그 영혼의 태생부터 비천하여 지옥의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갈 수 없었다. 고작해야 악마와 인간의 경계 가장자리, 인간의 숨을 대신 들이마시는 가장 높은 곳의 악마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찰랑거리는 소리를 내며 고인 세상을 향한 지식은 그저 비루하여 좁은 시야 안에 갇혀 있을 뿐이었다. 때문에 늙은 지옥의 백작은 황망한 얼굴로 제 무릎에 매달린 수양딸의 혼란이 어디서 기인하는 지를 일찌감치 알 수밖에 없었다. 악마가 되면서 썰물처럼 빠져나간 인간의 지식이 악마의 혼란으로 채워진 탓이었다. 가늘게 이어지던 숨이 진흙 속으로 가라앉으며 영원을 얻은 이후로 악마가 된 인간의 딸은 그 자체로 오롯한 종잇장과 다름없었다.
이렇게 사랑하는데, 이렇게나 사랑하는데.
윤, 우리 아가씨.
사랑하면 먹고 싶어진다고, 스콧이 그랬잖아요. 그런데 나는.
악마가 사랑하는 방식은 먹어치우는 거지, 영혼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와작와작 소리를 내면서. 갓 악마가 된 인간의 딸은 제 영혼에 진흙을 채워 넣은 수양아버지의 말이 오직 세상 단 하나 뿐인 진실로 믿었다. 때문에 그녀는 인간의 숨을 대신 마시고 그것으로 몸 안의 뻥 뚫린 구멍을 채워 넣으면서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라고. 그것을 알려준 대악마는 그렇게 생각했다. 했었다. 제법 오랜 과거에 그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로 틀린 말이 아니었다. 악마들은 식욕으로 사랑을 표현했다. 상대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뼈 부러지는 소리를 내며 씹어먹는 이들이 지옥에는 언덕으로 쌓여 있었다. 사랑을 느끼는 대상의 마지막 한 조각까지 독물이 떨어지는 식도와 핏줄기도 비치지 않는 피부 안으로 쑤셔박는 쾌락이 그들이 사랑을 느끼는 종착점이었다. 지옥의 조각 중 하나를 다스리는 백작인 늙은 대악마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했었다. 진실을 위해서 시점은 다시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
윤.
짧은 부름에 대악마의 수양딸이 비련을 뒤집어 쓴 공주님처럼 고개를 들었다. 인간이 아니기에 온기가 돌지 않아 창백한 얼굴이 붉게 번들거리는 핏물로 흉하게 젖어 있었다. 악마는 늘 피울음을 울었다. 인간이 눈물을 쏟아내듯 눈가에 고인 핏물을 주르르 쏟아내는 것이 그들의 울음이었다. 손을 내어 수양딸의 뺨을 감싼 지옥의 백작은 엉망진창으로 얽히고 뭉개진 가는 머리카락을 그 얼굴 위에서 걷어내었다. 대악마의 수양딸, 그의 가장 아픈 손가락, 진흙 속으로 그가 끌어내린 인간의 딸. 지옥과 인계의 가장자리 그 어드메에서 제게 욕정을 가진 인간의 숨을 들이마시며 공복을 채워가는 서큐버스는 수양 아버지의 손 안으로 온순하게 뺨을 문질렀다. 내가 햇살 아래에 녹아내릴 것 같았대요. 속삭이는 목소리는 연심을 담아 붉고, 눈물로 젖어 척척하고, 그리고.
이렇게 사랑하는데, 사랑에 빠졌는데, 나는 먹고 싶지 않아요.
아, 너는 결국 ‘사랑’을 배웠구나.
3.
수많은 수컷 인간들이 풍기는 욕정의 내음은 허기에 불을 붙였다. 당신을 사랑해, 하고 말하는 그 목소리에서는 식욕이 당기는 기름진 식사의 냄새가 풍겼다. 때문에 윤은 거리낌 없이 그들을 사랑할 수 있었다. 식욕과 직관되는 사랑, 먹어치우는 것으로 완성되는 것, 스콧이 알려준 악마의 사랑방식. 때문에 그녀는 먹었다, 사랑했다, 머리의 끝부터 발끝까지, 영혼의 시작부터 그 안 쪽 깊숙한 곳까지 모조리 씹어 삼키고 으스러뜨렸다. 그녀에게 있어서 포만감과 사랑은 같은 의미를 가졌다. 나도 사랑해요, 하고 말하는 것은 식사를 위한 준비였다. 테이블보를 깔고, 식기를 늘여놓는 일련의 과정들.
하여 그녀는 대릴-별의 눈을 가진 남자를 만났을 때도 그런 생각을 했다. 쏟아지던 달빛 아래 별의 색깔을 가진 푸른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던 인간 남자, 터진 입가를 멀거니 달싹이다 다물어버린 인간 남자를 그녀는 사랑했다. 아주 맛있는 정찬이 될 것이라고, 왜냐하면 그녀가 그를 너무나도 사랑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창가에 두 발을 붙이고 박쥐의 피막을 둘러싼 날개를 접어내린 그녀를 보고 입술 바깥으로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숨을 틀어막고 바라보던 그의 뺨을 감싸면서, 그녀는 그런 생각을 했다. 정말이지 더 이상 맛볼 수 없을 가장 맛있는 사랑이 되어줄 것이라고.
너, 낮에도 안 없어지네.
그런데 잠이 가시지 않은 눈은 무구하게 빛나고, 마디가 불거진 손은 아주 고운 것을 만지듯 조심스레 머리카락 끝에 닿고, 탁하게 가라앉은 기묘한 빛깔의 목소리가 공기 끝에서 풀어졌을 때. 빼앗긴 생기를 햇빛이 채워주듯 쏟아지는 빛줄기를 뺨 위에 머금고서.
햇살 아래서는 녹아버리는 줄 알았어.
악마의 사랑이 식욕 외의 다른 방식으로 발아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 웃음을 보는 순간 사라진 식욕과 그 뒤를 따랐던 둔중한 박동은 대체 무엇이라고 해야 한단 말인가?
4.
입술과 입술을 붙인다. 혀와 혀끝을 얽는다. 손과 손의 깍지를 낀다. 인간들은 이런 걸 왜 좋아하는 걸까, 하고 생각했던 조각들이 있었다. 뺨을 쓰다듬는다. 이마와 이마를 붙인다. 눈과 눈을 바라본다. 악마는 이해할 수 없는 방식이라고 생각했던 순간들이 있었다. 체온과 체온이 닿고, 시선과 시선이 닿고, 육체 안의 포만감이 아닌 내면의 구멍이 빠듯하게 채워지던 순간들.
처음처럼은 안 하네.
내가 어떻게 했는데요?
죽 딸려가는 느낌이었는데.
그러니까, 내장이. 음울함이 매달려 있던 눈가에 희미하게 주름이 잡히기 시작한 그는 인간의 내장과 동물의 내장이 어떻게 다른지 모를 것이다. 그래도 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안온하기 짝이 없는 낯선 순간에 그녀가 악마라는 사실을 핏빛으로 덧바르고 싶지 않았으므로. 햇살이 그녀를 녹이지 않느냐 순진하게 묻던 대릴은 이제 금빛으로 물결을 그리는 햇살 아래 그녀의 목덜미에 이마를 대고 있었다. 등 뒤로는 그녀가 아주 오래 전에 가졌을지도 모르는 심장 박동이 툭툭 피부 위쪽을 울렸다. 마디마다 뼈가 툭 튀어나오던 손은 이제 그 끝에 딱딱하게 인이 박혀 있었다. 그것들이 낯선 관념을 낚아 올렸다. 시간과 경험과 추억 따위의 관념들. 그녀가 일찌감치 잊어버려 이제는 어느 구석에 처박아 놓았는지 알지 못할 것들에 대하여.
그게 네 ‘식사’지?
햇수를 손가락으로 꼽아보라 말한다면 열 손가락을 접고 두어 개를 펴야 한다. 손가락의 개수로만 따지면 그리 많은 것들은 악마의 삶에 비견하면 숨결 한 번과 같이 덧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사랑하는 인간의 외견과 내면에는 수없이 많은 것들이 쌓이고, 비워지고, 뭉개졌다가 다시 쌓아올려졌다. 그녀도 어쩌면 조금은 달라졌을 런지도 모른다. 인간에게는 오랜 시간이니까.
인계의 시간으로는 오랜 시간동안 그녀가 사랑한 남자는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댄 채로 그렇게 물었다. 제법 시간이 지나도록 쓰지 않았던 단어는 끄들려 오는 순간부터 그녀의 목울대 안쪽으로 칼을 꽂았다. 악마는 인간을 먹는다. 악마인 서큐버스는 인간 사내의 생기를 먹이로 삼는다. 그리고 그녀는. 그녀는 잠깐 입술 사이로 바람 새는 소리가 나게 틈을 냈다가 금방 다물었다. 허리를 휘감아 끌어당긴 팔뚝이 머뭇거렸다. 있잖냐. 들리는 목소리의 끝은 틈을 내면서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배고프면 먹어도 상관없어. 난 죽어봐야 켕길 것도 없고.
먹는다, 씹어 삼킨다, 사랑한다. 한 때는 같은 뜻을 가지고 있던 단어들. 그녀의 사랑은 식욕이었다. 그녀를 슬하로 들인 대악마, 지옥의 북부에 영지를 둔 백작은 그녀에게 그렇게 가르쳤다. 악마에게 사랑의 표현은 식욕이란다. 먹어치워서, 뼈 안의 골수까지 네 것으로 만드는 거야. 그 누구도 네가 사랑하는 이를 가로챌 수 없도록. 그녀는 그렇게 배웠다. 그렇게 자랐다. 그렇게 사랑했다. 했었다. 모든 행동이 진실을 모르던 순간은 과거였다. 잘못된 방향으로 뻗어가던 의의를 되돌려 놓은 존재가 그녀를 끌어안은 채 어깨에 입을 맞췄다. 마르고 수줍은 입맞춤이 사랑스러웠다. 먹고 싶지 않았다. 아주아주 오랜 시간 동안 옆에 있어줬으면 했다. 그의 존재가 그녀의 살결 한 점 한 점에 새겨지는 것보다, 더 이상 그 누구도 대릴을 보지 못하는 것보다, 그가 웃는 소리가 듣고 싶었다. 나직하게 뭉그러져 떨어지는 웃음 소리와 제게로 향하는 손의 온기가 포만감보다도 더 무게를 가지고 공간을 짓누르는 것을 원했다.
…싫어, 먹지 않을 거예요.
어째서에요? 나는 그 이를 사랑하는데, 먹고 싶지 않아. 먹어치우고 싶지 않아. 아주 오래된 이야기이다. 인간의 뿌리를 가진 서큐버스가 저를 직접 진흙에 파묻은 수양아버지의 무릎에 이마를 대고 입술을 깨물어가며 울던 때가 있었다. 햇살에 녹아내리는 줄 알았다고 웃던 인간 청년의 이야기를 하던 때가 있었다. 제 사랑이 사랑이 아닐까 두려워하던 때가 있었다. 잠이 덜 깬 무구한 얼굴이 잘못 손을 대면 부서질까 머뭇거리는 손길로 긴 머리채의 끝을 매만지던.
당신은 먹지 않을 거야.
당신은 먹고 싶지 않아.
5.
병약한 인간의 딸을 소중하게 여겨 그 영혼의 끝을 진흙으로 파묻은 대악마는 제가 되살려낸 딸의 뺨을 두 손으로 소중하게 감쌌다. 내 소중한 아가씨. 노래, 노래하듯이. 그 머나먼 옛날, 허무함에 질식해가던 악마가 기어코 피를 토한 필멸자의 핏덩이와 처음으로 눈을 마주쳤을 때처럼. 그 필멸자의 죽음을 바라지 않는 자신을 깨달았을 때, 그 살결을 씹어 먹는 것을 원하지 않는 자신을 알아챘을 때, 그리하여 그 바르작거리는 인간의 목숨이 지옥의 끝자락 밖에 차지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제 슬하로 들였을 때, 그 때처럼.
사랑을 알아버렸구나.
씹어 삼키는 것이 아니라, 부스러뜨리는 것이 아니라, 목 안 쪽으로 욱여넣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식욕으로 발아하는 사랑이 아니라. 눈가에 번들거리는 핏물이 껌벅이는 눈꺼풀의 서슬에 주르르 손등에 묻어나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지옥의 백작은 울 듯 웃었다. 웃는 듯 웃었다. 내 소중한 딸, 내가 태어나 유일하게 사랑한, 나의 딸.
네가 오롯한 사랑을 배워버렸구나.
6.
“싫어, 나는 당신은 먹지 않을 거예요.”
‘사랑’하는 인간에게, 악마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악마에게는 오래지 않은 시간이었고 인간에게는 오랜 시간이었다. 음울함을 거미줄처럼 얽어 떨어뜨린 눈가에 주름이 잡히고, 때를 모르고 파여진 볼우물 같은 우묵함이 남자의 입가에 머무르는 때. 허나 그 모든 변화는 오롯하게 사랑을 배워버린 악마에게는 발자국 하나 남기지 못해 그녀는 그 뺨을 다정하게 감싸며 새그럽게 웃었다.
“왜?”
“왜냐니?”
“나는 인간이고, 너는 악마고……. 그러니까, 서큐버스인지 뭐시긴지. 아무튼 인간을 먹고 사는데.”
나는 네게 있어서는 그저 한 순간이잖아. 식욕과 사랑이 동일어였던 시절이 있었다. 모든 것을 안으로, 안으로 욱여넣어 빠득빠득 소리를 내어 분질러 삼키면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녀는 웅얼웅얼 목소리를 뭉개는 입술 위로 손가락 하나를 세웠다. 싫어. 나는 당신이 오래도록 내 곁에 형체와 목소리와 마음을 가지고 있어줬으면 좋겠어. 당신이 마지막으로 쉬는 숨까지 듣고 싶어. 당신이 웃는 모습을, 당신이 나를 부르는 목소리를 오래도록 듣고 싶어. 당신을 사랑하지만 당신을 먹고싶지 않아. 인간의 숨을 훔쳐 제 숨으로 삼는 서큐버스가 그런 생각을 했다. 내 사랑이 당신의 죽음이 되기를 원하지 않아.
“아니, 아니에요.”
지옥이란 죽음을 관장하고 지옥의 식솔은 죽음에 가깝기 마련이었다. 그 입술로 인간의 삶을 기원하는 것은 얼마나 역설적인 일인가.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네가 오롯한 사랑을 배워버렸구나. 그렇게 말하던 수양아버지의 목소리가 귓가에 희미한 온기를 남기고 떨어졌다가 금세 흩어졌다. 나는 당신을 먹고싶지 않아. 사랑을 깨닫지 못한 순간 시작된 공복감은 사랑을 깨닫는 순간 아래로, 아래로, 더 깊은 심연으로 가라앉았다. 당신이 오래도록 내 곁에 있었으면 좋겠어. 오래오래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 모습을 보고싶어.
“소중한 당신을 사랑하니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
당신을 사랑하니까.
7.
사랑을 배워버린 악마가 햇살처럼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