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잡아줘요
나 떨어져요
운명의 나락으로
Me and The Devil
이브의 고백
저는 오늘 밤 너무나 숭고한 이 진실의 자리에 섰습니다. 이 순간 이전까지 당신께서 얼마나 잔인했었는지 묻지 않겠습니다. 저의 죄가 저를 진창에서 끌어내 가장 고귀한 빛 앞에 감히 서게 했기 때문입니다. 별들의 자비를 읽어달라고 애원하지도 않겠습니다. 주여, 제 눈물은 닦아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피를 쏟을 뿐이어요. 이 피는 저의 죄이니 감당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영영 지옥에 처박아도 좋고 어떤 고통에 묶여도 좋으니 지금 단 한 번만. 나의 피터를 돌려주세요. 설령 당신께서 괘씸히 여겨 저희를 다른 무저갱 속으로 흩어버려도 제가 그를 찾아내겠습니다. 얼마가 걸리든 반드시 찾아내고야 말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그를 제게 돌려주세요.
악마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이는 필연적으로 인간과 신에 대한 이야기겠죠. 글쎄요, 우선 저는 종교적인 인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태어나기 전부터 교회에 다녔으니까요. 당연한 유아 세례, 성인이 되고 나서도 부모님(정확히는 엄마였습니다. 제가 볼 때 저희 집에서 엄마만이 진정한 신앙인이셨죠. 나머지는 그저 엄마가 원하니 따라다니는 허수아비들이었습니다.)을 따라 매주 일요일마다 예배에 참석했죠. 솔직히 말해 예배 시간은 따분하기 짝이 없는 시간들이었습니다. 저는 늘 억지로 1시간 동안 성경책을 이리저리 뒤적이며 그나마 흥미로운 부분들을 발췌해서 보느라 목사님의 설교 따위는 제대로 듣지도 않았어요. 창세기 초반, 아가서, 요한계시록은 그나마 재밌는 부분입니다. 소설의 영감을 얻기 좋은 구절들이 많아요. 성경 페이지 아래 토막 상식 코너도 꽤 재밌었습니다. 팔레스타인의 문화, 헬라어 뜻풀이, 당시 시대상 등등이 간단하게 나와 있어서 대충 읽어두면 얕게나마 교양을 쌓는 기분이 들었답니다.
그렇게 워낙 내키는 대로 성경을 읽다 보니, 목사님이 설교하시는 내용과 제가 해석하는 성경이 너무 다르더군요. 그래도 19살 때까진 목사님 말씀에서 어느 정도 감동을 받고 가슴이 울린 적도 왕왕 있었는데 어느 기점을 넘어버리자 그저 지루한 내용의 변주일 뿐이었습니다. 봉사하라, 전도하라, 회개하라. 대체 뭘 더 바라나요? 저는 살아있는 것 자체가 죄이며 구원은 죽음 너머에나 있다면 삶은 형벌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목사님은 점잖은 분이셔서 동성애를 입에 잘 담지도 않으셨지만, 담는다면 그건 올바르지 못한 죄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날부터 저는 더 이상 목사님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습니다. 이야기가 길었네요. 어쨌든 말하자면 저는 제 종교에 깊은 회의감을 20년 넘게 쌓아왔으면서도 적당히 엄마 눈치를 보며 교회에는 꼬박꼬박 잘 다녔습니다. 애초에 신의 존재를 의심했지만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그 신은 하나님일 확률이 제일 높다고, 자란 환경대로 막연히 추측했을 뿐이죠.
엄마는 어렸을 때부터 제가 질투심이 많은 아이였다고 말하셨습니다. 저는 줄곧 내가 외동이길 바라곤 했는데, 그 까닭은 부모님의 사랑을 혼자 독차지하길 바라서였습니다. 제게 하나 있는 오빠란 부모님의 사랑을 이등분하는(혹은 저보다 더 큰 몫을 앗아가는) 존재여서 제겐 증오의 대상이었습니다. 저는 분에 넘치는 사랑으로 보살핌 받았으면서도 항상 굶주린 괴물처럼 더 삼키고 싶어 못 견뎠습니다. 어딘가 숨어 있는 구멍 틈으로 제가 받은 사랑들이 흩어져 버렸던 것입니다. 이런 강박적인 결핍은 여전히 제 속에 내재되어 가끔씩 혀를 날름거렸지만 조금씩 커가면서 숨기는 법을 배웠습니다.
이런 제가 어떻게 신에게만 매달릴 수 있을까요?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지구 상 인간만 해도 70억, 그 이전에 죽은 인구만 해도 무시무시하고 앞으로 태어날 인구수는 더 무시무시할 테죠. 신께서는 지구가 아니라 다른 어딘가 또 다른 생명체들을 만들어 놓고 즐기고 계실지도 모르겠군요. 어쨌든 모든 생명을 사랑하시는 신께는 이미 너무 많이 사랑해줄 존재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저는 그 무수한 존재 중 하나일 뿐입니다. 신은 공평해야 하죠. 저는 그것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예배 시간 제 앞과 뒤 옆 사람들, 일층과 이층으로 나뉜 예배당, 심지어 설교를 하는 목사님에게조차 견딜 수 없는 질투심이 들었습니다. 유일하지 못한 하나라는 것.
그 탓에 저는 일찍부터 우울했습니다. 11살이었을까요, 어느 날 밤 가만히 누워 오지 않는 잠을 기다리고 있을 무렵 갑자기 저는 뺨을 맞은 듯이 차가운 공포로 몸이 오그라들었습니다. 저는 삶의 불행과 죽음의 허무를 너무 일찍 깨달아버린 것입니다. 그 이후 저는 다른 또래 아이들과 다른 무언가를 가진 듯 했습니다. 실상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빈 구석을 온갖 반짝이는 걸로 싸매 속임수를 쓰는 광대였는데도, 저는 남들보다 더 크게, 자주 웃었습니다. 그리고 밤마다 이불을 입 속에 쑤셔 넣고 울었습니다. 저는 우울을 곱씹을수록 우울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냥 순순히 그 생각에 종아리를 잘라 던져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미쳐버리는 게 아닐까 싶은 날들이었습니다.
저는 천국은 존재하지 않더라도 지옥은 존재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편이 더 공정하지 않을까 했어요. 애초에 사람들 중에 천국을 갈 만큼 위대한 사람이 있을까? 뉴스를 보며 찢어 죽이고 싶은 사람들은 많았습니다만. 위대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숭고한 희생은 저 역시 높게 사며 찬탄하는 바입니다. 일일이 그들의 이름을 늘어놓는 것은 모욕이 될 테니 예시는 들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천국이 과연 천국일지 의심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어떤 영광과 행복과 기쁨도 영원히 지속된다면 허무와 불행과 광희로 퇴색하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상태의 지속이란 필연적으로 권태일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웃음의 끝은 무표정이며 여름의 끝은 낙엽이고 낮의 끝은 밤이기 마련입니다. 기나긴 낮 또한 백야라 칭하며 꺼리지 않습니까? 행복과 불행 중 영원할 수 있는 것은 불행입니다. 더없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에도 우리는 뒷목에 찬 사슬처럼 본능적으로 불안을 안고 있습니다. 이 행복이 영원하길 기도한다는 것부터서 우리도 이미 알고 있는 겁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위대한 격언은 진리인 양 시대를 뚫고 살아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놓치는 것은 저 말이 몇 천 년이고 지금까지 내려온 까닭은 인간이 지금까지 불행했다는 증거라는 겁니다. 불행은 지나가지 않습니다. 항상 그 자리에 있죠. 우리는 뒤 돌아 서서 미친 척 행복을 지껄이거나 마주 본 채 수긍하는 것뿐입니다.
불행 자체가 두려운 것은 아닙니다. 저는 이미 불행한 사람이고, 가끔씩 발작적으로 서러운 울음을 토하지만 이것이 두려운 것은 아닙니다. 불행에는 익숙해집니다. 밤마다 공포로 마비될 것 같은 머리는 덫을 쪼는 부리처럼 미친 듯이 구원자를 찾다가도 지쳐 잠들기 마련이었습니다. 외로움, 쓸쓸함, 세상에 인간은 무수하건만 제가 무슨 대수겠습니까? 그보다는 이렇게 쓸쓸함을 느끼는 인간들이 영원할 것 같다가도 끝내는 모두 죽어버리는 것, 혹은 망치로 찍히듯이 납작하게 빌빌거리다 다른 외로움을 낳을 것이 참을 수 없이 거북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결국 제가 궁극적으로 두려워했던 것은 영원입니다.
하지만 슬픈 일입니다. 저는 분명 영원을 두려워했지만 제가 허무한 까닭은 영원하지 않은 까닭에 있습니다. 두려움과 슬픔이 같지 않다는 것을 저는 서러움으로 배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신을 미워합니다. 신은 저를 불행하도록 만든 것이 틀림없습니다. 영원할 수 없다면 유일한 찰나가 되고 싶었습니다. 신만 유일하란 법이 있습니까? 그러니 당연한 결론입니다. 저는 모두를 사랑하는 신이 아닌 저만의 악마를 원했던 겁니다.
1.
그는 제 애인이었습니다. 인(人)이라는 말은 그에게 해당되지 않지만 적어도 인간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타협할 수 있겠죠.
그를 처음 봤을 때, 어둠이 내려 심해처럼 파랗게 잠긴 제 방 침대에 앉아 저는 기도마저 멈추고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희미한 물고기들만이 부유하는 어둠. 방 안은 저녁과 밤과 새벽이 순서를 정하지 못하고 왔다 갔다 멋대로 제 방을 외로운 푸른색으로 칠하며 시간을 가지고 놀고 있었습니다. 저는 감히 눕지도 못하고 죄인처럼 이불을 목까지 당긴 채 벽에 등을 기대고 무의미한 불빛이 깜박이는 창밖을 바라보았습니다. 일종의 자해였던 것 같습니다. 해답이 없는 의문의 연쇄를 끊지 못하고 미치기 직전까지 이어가는 짓거리였습니다. 그즈음엔 눈물도 멈춰서 소금기가 말라붙은 뺨이 간지러워 눈을 감고 손등으로 닦아내고 있었습니다.
“안녕.”
낮은 음성에 놀라 제가 고개를 들었을 때는, 어떤 남자가 가까이 서서 저를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비명을 지르거나 주먹을 휘두를 새도 없이 저는 오랫동안 기다려온 친우와 마주한 것처럼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습니다. 그가 인간이 아니란 것은 너무 당연했고, 그렇다고 귀신이라기엔 너무 멀쩡한 모습이라 판단이 잘 서지 않아서였습니다. 그 역시 태연하게 먼저 인사를 건넨 것치고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은 채 물끄러미 쳐다만 봤습니다. 그는 콧수염을 길렀으며 관자놀이 근처가 까치의 배처럼 희끗하여 나이가 많아 보였습니다.
“누구세요?” 한참 후에야 얼떨떨한 입술에서 때늦은 질문이 나왔습니다.
그의 입술에 야릇한 웃음이 떠올랐습니다.
“나는 네 입술 위의 이름, 너의 가장 오래된 절망. 불에 젖은 지하의 영이란다.”
그의 회녹색 눈동자는 입이 웃을 때도 웃지 않았습니다.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본래 운명이란 그런 법 아니겠습니까? 그의 피부는 유황을 끼얹은 것처럼 창백했습니다. 인간에게서 혈관을 모두 뽑아버리면 그런 색일 것 같았어요. 그의 옷은 어둠 속에서 윤곽이 분명치 않게 보여 마치 모든 어둠이 죽음의 장막처럼 보이게 만들었습니다. 발치 주변에 까만 먹장어 같은 옷자락이 흐늘거리며 까만 폭풍처럼 몰려 먹어치우고 있었어요. 무시무시했습니다. 죽음 그 자체를 본 듯했습니다.
제가 아는 한 죽음은 절대 아름다울 수 없는 단어이며 죽음 자체가 미화될 수는 없습니다. 근본적으로 죽음은 가장 원초적인 공포이며 고통이고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추한 모습을 보여주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순간 저는 그가 아름답고 느꼈습니다. 그의 마술적인 위압감이 저를 낚아챘습니다. 저는 공포에 빠진 것 같았습니다. 그 이후엔 사랑에 빠진 것 같았습니다.
“악마군요.”
저는 침착하게 인정했습니다. 그 외의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아닌 존재에게서 느끼는 어떤 낯선 경이가 저의 목을 졸랐기 때문입니다. 그와 나 사이에 칼이 놓여 있다는 경계감. 인류가 흘려온 비탄의 정체와 마주한다는 거부감이 이상한 그리움처럼 저를 어루만졌습니다.
“피터 베일리쉬. 흉내의 악마란다. 이브의 딸에게 인사드리지.”
그가 조용히 말했습니다. 숨결에서 박하 향이 풍겼습니다. 기묘한 향수라도 뿌린 듯이 그에게선 그을린 재와 박하 향이 섞여 났습니다. 저는 미심쩍어 눈썹을 찡그렸습니다.
“네…… 안녕하세요. 피터…… 여긴 왜 오신 건가요?”
이브의 딸이니 뭐니 저는 영 감이 안 잡혔습니다. 피터는 말없이 눈썹을 올렸습니다. 당황스러운 냉대에도 그는 웃는 낯을 잃지 않았어요.
“네가 나를 불렀잖니.”
“네? 아닌데요.”
당시 제가 기도했던 것은 하나님이 존재한단 증거지 악마는 아니었습니다. 혹여 하나님께서 대단한 역설가이신 게 아니라면(지금은 맞단 것을 알지만) 이건 무언가 단단한 착오라고 생각했어요.
“무척 상심한 표정이구나. 천사라도 올 줄 알았나? 너무 그렇게 실망하지 말라고.” 그는 능숙하게 저의 의심을 받아 넘겼습니다.
“어…… 음…….” 실망보다는 당황이었습니다.
“겁을 먹었구나. 그래, 누구라도 갑자기 낯선 이가 침대에 다가온다면 놀라겠지. 하지만 그럴 필요 없어. 난 이제까지 네 인생을 모두 알고 있지. 네 최초의 거짓말, 앞으로 네가 뱉을 최후의 거짓말까지 전부. 난 낯선 존재가 아니야. 너의 것이지. 무능력한 분노와 눈물이 나를 부르는 열쇠고 고통이야. 나를 두려워하지 말거라. 네가 진실과 직면하는 일은 없을 거야.”
그의 목소리는 속삭이듯이 조금 거칠었지만 제법 부드러운 축에 속했습니다. 아마도 신뢰감을 줘서 좀 더 쉽게 유혹하려는 일환이겠죠.
“네…… 알겠어요. 쓸데없지만 궁금한데…… 악마는 다 백인이에요?”
“흠, 아니.”
“그럼 악마는 다 남자인가요?”
“그것도 아니야. 질문이 조금 이상하구나.”
“여긴 한국인데 왜 난데없이 외국인 악마가 나타났나 해서요. 제가 요즘 문화 사대주의를 배우거든요. 음, 정확히는 문화 상대주의.”
그는 턱을 괸 채 고개를 기울였습니다. “그런 생각은 못 했었는데.”
그날 밤 저는 피터가 재워주는 대로 잠이 들며(처음으로 혼자 자게 된 11살로 돌아간 듯이), 그가 설령 악마여도 나와 이렇게 지내주면 괜찮을 거란 생각을 했습니다. 아무것도 몰랐던 시절이었습니다. 사랑, 그 이전이었죠.
2.
이제까지 말한 바로는 믿기시지 않겠지만 저는 천성이 밝은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왕 역시 젊은 시절엔 숫기 없고 순종적인 남자였잖아요? 마찬가지로 우울증이 과거를 바꾸는 건 아닙니다. 밝을수록 어두운 곳을 바라보고 어두울수록 밝은 곳을 바라보죠. 아무리 깊은 어둠을 바라봐도 그보다 밝은 빛에 둘러싸여 있었으니 붙잡힐 염려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렸던 저는 피터를 바라봐도 괜찮았습니다.
그러니까 아직 신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고 죽으면 당연히 천국에 갈 것이며 아니 애초에 죽음 자체를 몰랐던 제 유년 시절은 온통 눈부시고 황홀해서 그 자체가 황금이었으며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기에 더욱 애틋한 새 빛으로 덧칠되어 그 무엇으로도 견줄 바가 없었습니다. 그곳은 영원히 햇빛이 머무르는 오후입니다. 저의 모든 계절은 그곳에 숨어 있죠. 끝나지 않는 술래잡기와 숨바꼭질, 저녁은 오지 않고 풀잎을 실은 바람이 부는 여름날. 아마 제 남은 생은(이미 끝나버렸지만) 그 시절을 조금이라도 흉내 내기 위한 연극뿐일게 뻔합니다. 그런 제 어린 시절이 만약 단 한 사람으로 압축되어 눈앞에 선다면 대체 어떤 기분일지 감이 잡히시나요? 제게 피터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그는 제 유년을 덮은 밤이자 유년과 성숙의 지표였습니다.
그를 볼 때면 멀리 떠나고 싶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단순히 방랑에 대한 환상과 욕심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안전하고 평안한 일상을 사랑했으며 오히려 모험과 위험은 머릿속에의 상상으로만 즐기는 편이 더 좋았습니다. 다만 그와 한없이 오래 눈을 마주한 채 이런저런 농담과 피상적인 대화를 하고 있다 보면 문득 깨닫는 겁니다. 피터가 저의 가장 위대한 일탈이라는 것을.
“삶은 영원한 노래란다, 스위틀링. 네 노래가 끝나면 너의 딸, 네게 딸이 없다면 네 이웃의 딸로 이어지는 가락이지.”
“딸들만 노래해요? 아들들은 뭐하고요?”
“오래된 비유의 일종일 뿐이야.”
“빻은 비유네요. 제 점수는요, 좆까라입니다.”
“딸과 아들은 운율이 다르니까.” 피터는 눈썹을 치켜 올렸습니다.
“같잖은 변명인데요. 그리고 왜 노래가 영원해요? 인간이 개미처럼 계승, 계승, 계승해서 종족을 보존하는 건 본능이지 노래라기엔 전혀 낭만적이지 않아요.”
“인간에게 굳이 낭만이 필요하던가?” 피터는 심드렁하게 대꾸했습니다.
“어…… 저한테는요?”
“좋아. 실수를 정정하마. 아무것도 영원하지 않아.”
“이제야 믿음직하네요.”
어쩐지 불편한 표정으로 피터는 턱수염을 만지작거렸습니다. “배움이 늦구나, 나리. 날 믿지 않은 게 나와 만난 후에 네가 취한 제일 현명한 행동이었단다.”
저는 그를 향해 짜증스러운 낯을 던진 게 전부였습니다. 그 말이 당시로선 그가 처음으로 말해준 진실이었는데도요.
이것은 묘한 로맨스였습니다. 사랑이라기엔 가볍고 우정이라기엔 어딘지 껄끄러웠으니까요. 감미롭고 관능적인 기만이었죠. 가시를 다 바른 장미와 아가미만 도려내 다시 물가에 풀어둔 은색 물고기처럼. 우리는 끝없는 출 듯이 서로의 손을 잡았고, 시간은 보다 정교한 조각을 시작했습니다.
3.
“바빠 보이는구나, 스위틀링.”
비밀번호를 누르지 않고 아무 곳이나 나타날 수 있는 건 얼마나 편리한 일일까요?
“내일 시험이거든요.” 노트북 불빛으로 건조해진 눈을 깜박이며 제가 대꾸했습니다.
피터가 입고 있던 회색 소매가 달린 검은 벨벳 정장은 그의 회녹색 눈에 모종의 어둠을 드리워주었지만 우수에 찼다기보다는 남들이 모를 비밀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습니다. 저는 그가 (그 재수 없는 표정과 나이에도 불구하고) 퍽 잘생긴 남자라고 생각했지만 객관적인 판단일지는 조금 의심스러워서 굳이 입 밖으로 칭찬을 해주진 않았습니다. 피터는 이미 충분히 오만하기도 했고요.
“오늘 좀 세련된 것 같네요.” 그래서 돌려서 말했습니다. 아닌 척 해봤자 저는 그에게 물렀던 것 같습니다.
“오, 섭섭한걸. 나는 항상 최고의 모습만을 보여 주려고 노력하는데, 그 말은 오늘만 그렇다는 건가?”
피터의 눈에 장난기가 어렸습니다. 그럴 때의 그는 기분 나쁜 소년 같았습니다. 어른들을 놀리고 머리 꼭대기에 서서 실컷 농락하다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양 눈썹을 찡긋거리는 아이요. 대개 그런 아이들은 훗날 진실이 밝혀져 목을 매달리거나 끔찍한 어른으로 성장해 피터 같은 작자가 되곤 하죠.
“음…… 하긴 당신 하는 짓 보면 어디 가서 몰매 맞아 죽을 상이긴 해요. 봐봐요, 이렇게 칭찬을 해줘도 얄밉잖아요.”
저를 바라보는 피터의 회녹색 눈동자가 천진스럽게 반짝거렸습니다.
“요즘은 증오보다 사랑을 사는 게 훨씬 더 쉽단다. 물론 사랑이 더 귀찮긴 하지만. 그들에게 돈을 툭 던져 주면 기분 나빠하겠지만, 선물, 섹스, 찬사 그러니까 숭배를 주면 절대 사양하지 않지. 나의 스위틀링은 외로운 시대에 태어난 셈이야.”
저는 그 말에 흔들리만큼 염세적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는 사랑 때문에 화학반응이 일어난다고 보는, 그야말로 세상의 모든 가치는 사랑이라고 믿는 사랑 숭배자에 가까웠죠. 더구나 그가 악마였기 때문에 어느 정도 비판적으로 들으려 노력했습니다.
“숭배는 무슨 그냥 꼬시는 거잖아요. 그리고 거기에 넘어가면 좀 어때요? 그렇게 꼬드기는 사람이 나쁜 거지, 넘어가는 사람은 그냥 좀 운이 없고 멍청한 것밖에 없는데. 그게 죄는 아니죠.”
피터의 얼굴이 심각해졌습니다.
“나리, 사랑은 독이란다. 아주 달콤한 독이지. 너를 고통에 몸부림치게 만들고도 그걸 행복이라고 착각하게 만들어. 사랑에 빠진 자들은 모두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단다.”
“네에……. 꼭 사랑을 해본 적 있는 것처럼 말하네요. 해봤어요?”
“아니. 적어도 난 사랑에 빠진 자들을 오랫동안 아주 많이 봐왔지.”
“그럼 그 사람이 아픈지 어떻게 알아요? 보기만 해도 그게 느껴진다면 당신한테도 공감 능력이 꽤 있다는 건데. 대단히 의심스럽네요.”
그는 어떻게 하면 대답을 늦출지 고민하는 사람처럼 천천히 눈을 깜박였습니다. “글쎄…….”
“와, 회피하는 것 봐. 과거에 한 삼천 명 후렸나봐요.”
“그냥 해본 말이야.”
“하긴 당신이랑 치정극으로 엮인 사람은 다 지옥에 있겠죠. 욥기만 봐도 악마랑 엮인 인간은 좆됐잖아요. 아 시발 근데 내가 엮였네.”
“그 악마는 내가 아니었는데. 나랑 친하지도 않은 놈이야. 그리고 그건 신과 악마의 내기였으니 공평하게 따져야지. 따지고 보면 신이 허락했던 불행이었어.”
피터는 진심으로 억울하다는 듯이 입술을 비죽거렸습니다. 저는 그 얼굴을 경멸하는 눈빛을 굳이 숨기지 않고 노려봤습니다.
“아 됐고요. 인간들이 공유하는 습성이 있듯이 악마들도 비슷한 면이 있겠죠. 인간이 악마랑 엮어서 잘 된 적은 없어요. 파우스트만 봐도 그런데. 아, 근데 내가 왜 당신한테 엮어서. 이런 망할 염병을…….”
“그럼, 이브의 고귀한 딸이 나처럼 미천한 악마와 엮인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소리지.”
피터가 자신의 손바닥을 펴 보이며 말을 이었습니다.
“자, 하지만…… 릴리트의 후예가 뱀의 후예와 맺어진다면 그리 터무니없는 소리는 아닌 것 같구나. 안 그래?”
“이브든 릴리트든 전 그냥 인간이고 그냥 삶이 좀 짜증나는 정나리인데요.”
저는 피터의 헛소리를 일축하고 다시 공부에 집중하는 척했습니다. 어차피 희망 없는 상태였지만 최소한 시험 범위는 한 번이라도 훑으려는 시도였어요. 잠을 자지 못해 뻑뻑한 두 눈으로 기필코 글자들을 쑤셔 넣던 중, 갑자기 치민 짜증을 참지 못하고 책을 내던져버렸습니다.
“아아악! 공부하기 싫어요. 시발 존나 싫다고요.”
“하지 마.” 피터가 세상에서 제일 간단한 일처럼 말했습니다.
“아 근데 이미 F가 나올 수업이 3개예요. 나머지 강의들도 죄다 C이하고요. 저는…… 희망 없는 학점을 품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면 학사경고예요. 시발 진짜 이 학점 현실인가.”
“그토록 게으르게 굴었는데 당연히 각오를 했어야지.”
뭐 이딴 치사한 놈이 다 있지? 저는 순수하게 감탄했습니다. 어떻게 순간적으로 저딴 생각을 해서 맞받아 칠 수가 있지? 물론 다 맞는 말이긴 한데 최소한의 배려조차 없는 건가?
“아 진짜…… 자꾸 짜증나게 굴면…….” 제가 위협적으로 입을 열었습니다.
“왜? 내 수염을 왁싱이라도 해주려고?”
“내 다리에도 귀찮아서 안 하는 짓을 당신한테 왜 해줘요. 그냥 죽여 버리겠다고요.”
그가 호탕하게 웃으며 한참을 큭큭거렸습니다. 저는 그 소리를 싫어했지만 피터가 싫은 것은 아니어서 그냥 내버려 뒀습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계속 토라져 있는 것도 우스울 것 같아 저는 그가 뻗은 팔에 순순히 안겼습니다. 그는 만족스럽게 저를 고쳐 안으며 자신만만하게 말했습니다. 여전히 웃음기로 떨리는 목소리로요.
“너는 눈부신 춤을 출 거야. 우리는 신도 질투할 만큼 끝없는 춤을 출 수도 있지. 이 세상은 우리 것이 될 거란다.”
저는 불만스럽게 피터의 뒷목을 꼬집었습니다. “이건 비겁해.” 피터가 아프다며 투덜거렸습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저도 웃고 있었습니다.
“그니까 헛소리하지 마요. 지금 제가 학사경고 위기인데 뭐가 눈부셔요.”
4.
“확실히 진실보단 거짓의 수명이 더 길어. 세상에 오래 남는 건 결국 거짓이란다. 진실은 무덤에 갇혀버리거나 시체의 입을 통해서나 뻐끔대는 꼴이지.”
피터 베일리쉬의 세상 강의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핸드폰으로 트위터나 하며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주다가 염세주의를 참지 못하고 질문했습니다.
“그럼 다 거짓이란 말이에요? 앞으로도 영원히 누구든, 무엇이든?”
“대부분 그렇지. 물론 너와 난 빼고 말이야.”
저는 웃음을 터트렸습니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어요? 악마여도 최소한의 양심은 챙기고 말하죠.”
피터는 한숨을 쉬었습니다. 저는 그가 내쉬는 숨에서 향긋한 포도주, 정향과 육두구 가운데 희미한 유황 냄새를 맡을 수 있었습니다.
“착각하고 있구나. 나를 믿어달라는 게 아니야.” 그는 속임수에 빠진 어린 아이를 보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나를 사랑해달란 거란다.”
천천히 저의 손을 풀었다가 다시 손가락으로 엮으며 그는 망설임처럼 쓴 웃음을 지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세상에서 태어났지만 그들은 우리의 세상에서 죽을 거란다.”
“지금 그거 고백이에요?”
슬픈 일이지만 저는 눈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치자.” 피터는 포기한 기색이었습니다.
그는 제 손을 뒤집어 팔목에 살짝 키스를 했습니다. 푸르스름한 혈관 위를 스치는 입술은 부드러웠고 콧수염이 조금 간지러워서 괜히 입술 끝이 간지러운 기분이었습니다. 저는 영원을 두려워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영원해도 좋을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그때 피터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그 멍청하고 서투른 나를 보며. 아마 그는 내가 모르는 방식으로 죄책감을 느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5.
그는 이상하게 제 눈물을 못 견뎠습니다. 냉소적인 태도를 못 버려 저를 화나게 만든 적은 많았어도 어쩌다 제가 눈물을 보이는 날엔 그야말로 세상을 다 따다줄 듯이 저를 어르고 달래며 어떻게든 눈물을 그치게 만들려고 애썼습니다. 마치 제 눈물이 그에겐 피라도 되는 양, 가슴에서 솟구치는 상처를 봉합하듯이 절절하게 구는 것이었습니다.
“왜 우니, 스위틀링? 아무도 널 괴롭히지 못해. 넌 이제 안전해. 중요한 건 그거야. 내가 옆에 있는 한 아무 일 없을 거야. 그러니 왜 우는지 말해주렴.”
“아니요, 피터…… 왜 우는지 저도 모르겠어요…….”
어림없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언제나 제가 왜 우는지 알았습니다. 다른 건 다 모르더라도 그것만은 꼭 알았습니다. 그건 제 평생 가장 열심히 파고든 종목이었습니다. 저는 손등으로 눈두덩을 문지르며 눈물을 꾹 참아냈습니다.
“그냥 우는 거예요. 사실 저는 죽고 싶은 게 아니에요. 그냥 태어나고 싶지 않았어요. 저는 그냥 사라지고 싶어요. 그게 안 된다면 바다로 돌아갈래요. 사람들은 죽으면 땅으로 돌아간다지만 나는 다를 거예요. 난 아마 죽으면 바다로 돌아갈 거야! 난 물고기니까…….”
피터는 제 눈물이 헤프다고 나무라지 않았어요. 그는 인어를 낚는 어부처럼 가만히 저를 안아주었습니다.
“그러렴.”
어찌나 다정하던지 저는 그가 악마라는 것도 깜빡 잊을 뻔했습니다.
“그럴 거예요.”
저는 형편없이 눈물과 콧물을 닦아내느라 그의 옷을 망쳤습니다. 콧물을 손등으로 닦아내고 그의 어깨에 이마를 문지르며 눈을 감았습니다.
“맘껏 울거라. 네가 바라던 천국은 사실 환상에 불과하고, 네가 두려워하던 지옥이 사실 이미 네 현실이니까.”
그는 저주도 축복처럼 말하는 재주가 있었죠. 저는 잠자코 듣고만 있었습니다.
“끔찍한 일이 일어날 거야.”
“그러라고 해요. 죽으면 다 끝이니까.”
저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담담하게 허세를 부렸습니다. 그가 너무나 얄미웠기 때문에 그가 바라는 대로 호들갑을 떨어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피터는 짐짓 관심 없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저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습니다.
“네가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당연하죠.”
“죽음이 두렵니, 나리?”
“안 무섭기도 어렵잖아요.”
“사람들은 자기 식사 자리에도 죽고, 자기 침대에서도 죽으며, 자기 방 변기 위에 쭈그려 앉아서도 죽는단다. 모두가 조만간 혹은 언젠가는 죽는 거야. 네 죽음에 대해서가 아닌 네 삶에 대해 걱정하거라. 네 인생이 계속되는 한 삶의 주도권을 잡아.”
“굉장히 실용적인 말이네요…….”
어느새 울었던 것도 잊은 채 저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습니다.
“내가 죽으면 어떡할까요?”
딱히 거창한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은 아니었습니다. 만약.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가는 모두에게 가슴을 부여잡는 고통의 시간은 오기 마련입니다. 그냥 피터의 반응이 보고 싶었습니다. 피터는 자세를 바꾸며 제 이마를 엄지손가락으로 매만졌습니다.
“네가 죽으면, 나의 불쌍하고 용감하고 사랑스런(“아 미친 제발.”) 스위틀링은 베드로와 야고보가 인도하는 구름 계단을 밟아 흰 백합과 환희의 문을 넘겠지. 다니엘이 지나온 황금문을 아나? 풀무불도 넘지 못하는 구경거리인데…….”
“아니. 나 말고 당신이 어떻게 할 거냐고요.”
문득 그는 빗질을 하다 처음으로 흰 머리를 발견한 중년 부인처럼 물끄러미 제 얼굴을 들여다봤습니다. 저는 어색하게 눈알을 굴리며 신경 쓰지 않는 척 했지만 그의 검푸른 시선이 낱낱이 제 얼굴을 훑는 것에 새삼 불편해졌습니다. 한참 후에야 얼굴을 찡그리고,
“글쎄.”
그러고는 입술을 다물었습니다.
피터의 얇은 입술을 보며 저는 누군가가 죽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저를 부족하게 했어요. 결핍을 느끼게 만들죠. 그리고 나도 그를 채울 수 없었습니다, 우린 둘 다 그러니까……. 그제야 인정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행복해질 수 없다면 같이 불행할 수는 있다고. 저를 둘러싼 모든 운명과 폭풍, 수명과 한계, 생쥐의 시간과 떨리는 손을 저주합니다. 저는 포도밭을 탐하는 여우입니다. 피터는 포도밭의 덩굴이죠. 여우는 열매와 과즙을 핥기 위해 팔짝거리지만 덩굴은 점점 더 세게 옥죕니다. 뒤늦게 함정을 깨달은 여우는 몸부림치지만 결국 도달하는 결말은 교수형입니다.
6.
새삼? 그는 저입니다. 저의 모든 사랑이며 영원한 고통. 이제 와서 후회하지 않는다기에는 너무 고통스럽지만 그가 없었다면 저는 또 무엇이었을까요? 아마도 저는 불행을 불행이라 말하지 못하고 시시한 연기나 일삼는 광대로 종말했을 것입니다. 악마와 나. 피눈물을 목걸이처럼 두른 우리는 완벽한 짝이었습니다.
적어도 피터가 저를 속였다는 것을 말하기 전까진 그랬습니다.
“세상이 다 거짓이어도 우리 둘은 아니라면서요.”
“그래, 그랬지. 하지만 그 이전에 나를 믿지 말라고도 했었는데.”
저는 뱃속이 울렁거렸습니다.
“언제부터요?”
“처음부터.” 그가 쓰게 웃었습니다. “네가 내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기억해? 그때 너는 너무 어리고 외로웠지. 쉬운 상대였어. 순진하고 말이야. 나는 신과 내기했다. 네 영혼을 걸고 파멸을 감수하고도 나를 택할지, 미래의 천국에 매달릴지…… 너는 신이 존재한다면 증거를 내려달라고 했지. 그게 나야. 빛이 존재한다면 반드시 그림자가 존재하듯이 반증이나 다름없는 존재 말이다.”
그러나 그림자 너머에 빛이 존재할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저는 늘 그 사실이 싫었습니다. 때로 피터는 두 사람인 것 같았습니다. 그는 저를 지켜주는 따뜻하고 재미있고 점잖은 피터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교활하게 미소 지으며 제 귀에 대고 다정한 거짓말을 속삭이는 악마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 둘을 구분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실수를 저지른 것입니다.
“왜…….” 저는 뒷말을 삼켰습니다.
“이제야 말해주냐고?”
그는 움켜쥔 손으로 가슴 위의 옷자락을 구겼습니다.
“네가 소중해. 너는 내 핏속에 스며든 유일한 예외야. 더는 널 속이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나아.”
이제 와서? 저는 미친 듯이 악을 쓸 것 같은 입을 손으로 막았습니다. 예상했던 반응이 아님을 깨달은 그는 이윽고 제가 감정들을 삼키고 있단 것을 눈치 챘습니다.
“넌 이 세상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의 절반은 아마도 믿지 못할 거다, 나리. 신은 계속해서 어리석은 일을 하며 실수를 저지르고 있지. 인간들, 백치들, 귀머거리와 장님들로 이뤄진 세상을 지켜만 보며 말이야. 난 신이 너무 외로운 나머지 미쳐버렸다고 생각했었지만, 나 역시 그 장난의 배우가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단다. 이건 꽤 당혹스런 일이야. 불운하기는 우리 둘 다 마찬가지구나. 낡은 비극이지. 네게는 희극일지도 모르겠구나.”
뱃속이 참을 수 없이 메스꺼웠습니다. 목이 울렁거리고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아 저는 계속 입술을 손바닥으로 짓누르며 숨을 가다듬는 와중에 내뱉었습니다.
“그래서 어쩌라고요?”
“나를 죽여.” 그가 자기 심장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목숨은 목숨으로 갚는 거니까. 알잖니. 예수조차 인간을 위해서 자기 피를 흘려야 했듯이 영혼을 지옥 밑바닥에서 끌어내려면 빈자리를 채울 피가 필요해. 네가 해야 할 일이라곤 네 손으로 직접 가시나무 칼로 내 심장을 찌르는 거야. 여기 이 자리에.”
그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피터를 죽인다? 저는 몸을 떨었습니다. 피터가 한 팔로 저를 감쌌지만 저는 더욱 몸서리쳤습니다.
“싫어요.”
제 목소리는 좁은 틈을 통과한 새처럼 가늘었습니다. 반면 숨소리는 거칠어서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싫다고요. 제발.”
“이건 연극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구나, 나리.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사실 지금이 유일한 순간이야.”
“아뇨, 그런 건 몰라요. 굳이 알고 싶지도 않아요. 난 그냥 행복해지고 싶어요. 행복해지려면 단순히 돈을 많이 번다든가 성공을 한다든가 따위가 아니라 사랑을 통해서일 줄 알았어요. 그래서 당신을 바랐던 거예요. 나만 사랑해줄 누군가 아무나. 신이든 악마든 인간이든 아무나 좋으니까. 왜냐면 난 외로웠거든요. 다 그렇잖아요. 다. 나나 당신이나.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이러는 건데요.” 차라리 나를 죽여도 피터는 죽일 수 없었습니다. 저는 울먹이며 마구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냥 계속 거짓말을 하지 그랬어요. 그냥 계속 속게. 왜 이제 와서 착한 척이에요. 이게 더 가증스러워요.”
제 손을 잡으려다가 놓친 피터는 괴로운 사람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습니다. 항상 매끄러운 미소를 짓던 입술이 신음을 참는 듯이 다물렸다가 겨우 말을 이었습니다.
“너를 아낀다고 말하면 믿어주겠니?”
저는 헛웃음을 터트렸어요. 그게 최선의 허세였습니다. 저는 눈물이 줄줄 흐르는 와중에도 일그러진 얼굴로 비웃었습니다.
“이제 와서요? 또 거짓말이죠? 그냥 거짓말이라고 하세요. 지쳤어요. 당신이 지겨워요. 어디까지 믿고 어디서부터 의심해야 하죠? 난 이제 무의미에서 굳이 의미를 찾으려고 버둥대지 않을 거예요. 다 싫어요. 그냥 이대로 가요. 꺼져버리라고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저는 거의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습니다.
“내 인생이 통째로 부정당했어. 난 앞으로도 지금처럼 살 거야. 아니,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은 불행을 덤으로 껴안겠지. 난 이 따위로 살기 싫어서 도망친 건데 이젠 정말 답이 없는 거야. 죽어버릴 수도 없고 그냥 살아야 해. 다 싫어요. 아. 이게 뭐야. 이런 건 정말 처음이야. 어떻게 이렇게 아플 수 있지?”
어느새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습니다. 팔을 들어 대충 눈물을 닦은 다음 숨이 찬 목소리로 헐떡였습니다.
“마취도 못 받고 수술 받는 것 같아.”
피터는 자기 손에 제 손을 붙들어 두고 손가락으로 손바닥을 쓰다듬으며 갈라진 음성으로 속삭였습니다. “왜 내게 이토록 잔인하게 구는 것이니, 내 사랑. 잊어버렸니? 나는 네 연인이야.”
“닥쳐요!” 제가 악을 썼습니다. 어디까지 기만할 셈인지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구더기를 쥐었던 듯이 그의 손을 세차게 뿌리치고 온힘을 다해 그의 어깨를 밀어냈습니다. 그는 힘없이 밀려났지만 여전히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았습니다.
“연인을 지옥에 팔아치워요? 그건 가축이야, 그러다 그건 또 미안하니까 이젠 죽어주겠다?당신이 언제부터 나를 사랑했다고? 미친 짓 하지 마. 당신은 악마야. 나는 인간이고!”
저는 최대한 잔인한 어조로 두서없이 외쳤습니다. 죽고 싶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당장 꺼져. 나가. 다신 오지 마요. 죽여 버릴 거야.”
“넌 나를 죽여야 해.”
“혼자 죽어버려요. 내 손으로 죽이기도 싫으니까.”
“나리, 제발.”
“꺼지라고!” 제가 울부짖었습니다.
피터는 비척거리며 뒤로 물러났습니다. 그에게서 무언가 흐느끼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왔던 것처럼 사라져버렸습니다.
마침내 그가 떠났을 때 저는 홀가분함을 느꼈습니다. 그에 대한 감정이 식은 것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그를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항상 이별을 두려워했으나 더 이상 두려울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제야 저는 얼마나 불필요한 두려움에 매달렸는지 깨달았습니다.
쓴맛이 달라붙은 입가를 닦으며 제가 중얼거렸습니다. “다 끝났어. 이제 좀 쉬어야지. 일단. 일단…….”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줄곧 불안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친구와 웃고 있는 순간에도 그 친구는 제 옆에서 가만히 저를 바라보고 있죠. 그래요. 그건 어느 때나 옆에 조용히 붙어 있을 겁니다. 영원히 그렇겠죠. 저를 길은 잃은 걸까요? 끝을 향해 달려가는데 끝이 없는 겁니다. 아니 어쩌면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지도 불확실하고. 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인가. 그 질문을 스스로 끊임없이, 어느 정도의 의식이 자란 후부터 고문처럼 스스로에게 다그치고 되짚어 보았지만 답은 나지 않았습니다. 영원 앞에선 그 어떤 것도 몇 글자의 기호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무슨 소용이죠.
피터.
저는 울고 싶었고, 또 울고 싶었습니다. 모든 감정이 가시를 품은 회오리가 되어 가슴을 할퀴는 것 같았습니다. 바로 그것이 불행의 구체적인 실체였습니다. 그제야 제 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제껏 좀 더 경이로운 세계를 향해 팔을 뻗어 신비한 흐름을 따르고 싶어서 피터와 함께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에게 흉터를 새기고 싶었습니다. 그의 영혼이 땅을 두루 다녀 어떤 인간상을 지켜보든, 그의 날개와 다리와 손과 이마와 입술에 스치면 욱신거리고 반복될 생에도 지워지지 않을 영원성을 간직한 흉터를 지지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증오에 가까운 열망이었습니다. 저는 인간을 구하려면 자신을 포기해야 한다는 깨달음은 얻은 신의 아들처럼 입술을 떨었습니다.
언젠가 저는 피터에게 물었었습니다. 나 죽으면 어떻게 할 거예요? 금방 잊고 아주 잘 살겠죠? 생각하니까 좀 짜증나네요.
그는 검은 반지가 낀 손가락으로 제 이마를 쓰다듬으며 짧게 웃었습니다.
너 없이?
네. 나 없이.
그는 잠시 곰곰이 생각하더니 얼굴을 찡그렸습니다.
아마 다시 볼 수 없겠지. 너는 신의 품에 안길 테고 나는 다시 땅 위를 돌 테니. 하지만 난 네가 그리울 거야. 의미 없이 조용한 이 세상에서 네 생각을 하겠지. 내게 그런 영원을 요구하지 마렴.
내가 죽고 난 후 혼자 남을 피터. 나를 구하기 위해 죽는 피터. 저는 입을 틀어막았습니다. 토할 것 같았지만 그것은 울음이었습니다. 저는 사랑에 빠진 자였습니다. 아무것도 사랑해선 안 되는 존재를 사랑했지요.
7.
그로부터 몇 주가 지나 낮보다 밤이 길어진 지점을 넘어섰고 드디어 학기가 끝나 대학에서 풀려났습니다. 훌쩍 다가온 한여름이 눅눅한 바람을 불어대느라 여름 딸기처럼 붉어진 두 뺨을 제외하곤 그 무렵 저는 이상하리만치 창백해져서 부모님께서는 다시 빈혈이 도진 게 아니냐며 걱정하셨습니다. 빈혈이라니? 저는 피가 부족한 게 아니었습니다. 고통이 부족했지요. 두 시간 넘게 버스와 지하철과 기차와 택시 등 세상에 있는 모든 대중교통은 다 이용한 상태로 집에 도착하자 짐을 풀 여력조차 없었습니다. 저는 얼른 씻고 저녁 식사는 거른 채 침대에 엎드려 잠들었습니다. 기나긴 꿈을 꾸었어요. 오랫동안 울었던 것 같습니다.
잠에서 깨었을 땐 새벽이었습니다. 저는 몸을 돌리지 않아도 피터가 왔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혈관으로 이어진 거였을까 그냥 바로 알았습니다. 그는 기척조차 내지 않고 그저 제가 몸을 돌려주길, 자신을 봐주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염없이 그저 바라만 보는 것입니다. 언제부터 당신이 이렇게 내 눈치를 봤지? 제가 울면 세상을 비웃으며 눈물을 닦아주고 눈꺼풀에 키스해주던 것은 언제나 피터였습니다. 저는 늘 어렸고 피터는 늘 어른이었죠. 그도 울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저는 뒤돌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시 본 피터는 조금 말랐습니다. 많이 말랐는데 옷으로 가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광대뼈가 조금 도드라졌고, 눈 밑에 그늘이 져서 움푹 들어갔습니다. 시름이 그의 얼굴을 다듬은 듯이. 그는 예전처럼 미소 지었지만 어쩐지 서글픈 기색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의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었어요. 어두워서? 그를 처음 만났던 건 밤이었는걸요. 저는 그게 조금 슬프다고 느꼈습니다. 웃지 않아서? 그건 좀 가능성이 있겠군요. 어쨌든 그는 너무 낯선 얼굴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둠에 어깨가 젖었고, 램프는 야만적인 도구였습니다. 그가 아무 말도 없자 저는 조금 무서워졌습니다. 바람이 그를 석상으로 변모시켜버린 것 같았습니다. 신의 노여움을 사 소금기둥이 된 옛 이야기까지 떠오를 무렵, 그가 천천히 낮은 목소리를 냈습니다.
“안녕.”
그가 얼마나 망설였는지 알려주는 인사였습니다. 입을 열면 바로 쏟을 것 같은 기분. 침을 삼키듯 겨우 눈물을 삼키느라 어떤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그 음성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깨닫자 더없이 절망스러웠습니다.
“야윈 것 같구나.”
“당신이 더요.”
“그래? 난 괜찮다만.”
이제 모든 영광이 발가벗겨진 채 그는 거의 초라하기까지한 모습이었습니다. 왜 그 밤에 피터는 나를 찾아왔을까? 내가 외로웠던 것인지 피터가 외로웠던 것인지 영영 알지 못하리란 생각에 저는 더 서러워졌습니다.
“데리러 왔단다, 스위틀링.”
저는 대답하지 않았어요. 다만 납땜이라고 한 것처럼 거무죽죽한 시선만 그의 발치에 뿌릴 뿐이었습니다. 어떤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제 침묵을 다른 의미로 해석했는지 초조하게 앞으로 한 걸음 나서서 두 팔을 펼쳐보였습니다.
“네가 날 미워한다는 것은 안다. 나를 용서해달라는 게 아니야. 하지만 네가 괴로워하는 것만은 볼 수 없어. 우리 중 하나가 끝나야 한다면 그건 나여야 한다. 너를 지옥에 보내고 내가 어떻게 살아갈까?”
무언가를 두려워하듯 낮게 떨리는 목소리.
“난 네 고통을 견딜 수 없어.”
누군가를 너무 간절히 사랑하면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불행은 너무 달콤해서, 그 고통이 없는 한 우리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고통과 사랑은 결국 같은 것입니다. 나는 이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습니다.
“제가 당신을 죽여야 한다고요.”
그는 낯선 보석을 보듯이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괴로워하는구나.” 그가 말했습니다. 어쩐지 감탄하는 듯한 어조였습니다.
“내가 죽으면 슬퍼할까?”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럼요, 피터. 당신을 사랑해요.”
그리고 그 이상으로 그를 미워했습니다.
“난 그냥…… 난 당신이 없으면 살 수 없어요. 살기 싫어요. 당신만이 내가 원하는 만큼 사랑해줄 거야. 누구도 당신만큼 나를 사랑해줄 수 없어. 왜냐하면…….”
그는 제 손을 맞잡고 가슴께로 올렸습니다. 저는 그가 움직이는 대로 따랐습니다. 가까이에서 본 그는 전보다 훨씬 나이 들어 보였음에도 겁먹은 소년 같았습니다. 야윈 손이 저를 이끌어 그의 명치에서 아주 조금 왼쪽으로 비킨 부근, 심장이 뛰는 자리에 조심스럽게 제 손바닥을 올렸습니다.
“나는 너의 것이고, 너는 나의 것이니까.”
저와 같은 박자로 뛰는 심장에 손이 델 것 같아서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습니다. 그리고 피터는 품 안에서 낡은 단도를 꺼냈습니다. 그것은 쐐기와 엉겅퀴가 감긴 가시나무 칼이었습니다. 가장 고귀한 피를 마셨던 십자가의 형제가 이제는 가장 더러운 피를 마시기 위해 번뜩이고 있었습니다. 끔찍한 일이 일어날 거야. 언젠가 피터가 제게 했던 말이 가장 끔찍한 형태로 실현되는 순간이었습니다. 피터는 오랫동안 제 목덜미에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침묵이 그의 혀를 앗아간 것 같았습니다. 이윽고 천천히, 시간마저 늙어버린 후에야 공허에서 쫓겨난 듯이 그는 고개를 들었습니다. 피 묻은 얼굴과 마주한 그 순간 저는 흐느낌을 터트렸습니다. 그의 얼굴은 젖어 있었어요. 그가 울고 있었습니다…….
“네게 내 모든 죄를 말해주겠다. 너는 칼을 벼리렴. 망설이면 안 된단다, 내 사랑, 너는 내게 잔인해야 해. 네가 네게 그랬듯이…….”
그의 손은 떨리고 있었지만 제 손이 더 형편없이 떨렸기 때문에 상관없었어요. 그는 저를 가까이 끌어당겨 양손으로 제 손을 잡고는 오랫동안 손등에 키스를 했습니다. 의식처럼 입술을 뗀 후엔 무덤을 파듯 침착하게 제 손가락을 하나씩 칼자루에 감아쥐게 했어요. 칼은 얼음처럼 차가웠습니다. 가시와 엉겅퀴가 감겨 손바닥이 찢어졌고, 저는 눈물이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피터.” 입 속에서 말들이 으깨졌습니다. “나, 나 못하겠어요. 우리 그냥 멀리 도망쳐요. 아무 데나요.” 저는 칼을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흐느꼈습니다. 모든 게 걷잡을 수 없이 두려웠습니다. 그는 제게 잔인했습니다. 이럴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어딘가 먼 곳으로 도망쳐야 했습니다. 천국도 지옥도 없는 곳으로.
“나리.”
피터는 제 허리를 감싸 안았습니다. 저는 그를 밀쳐야 했으나 그러지 못했습니다. 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그에게 몸을 맡겼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난 알아. 네 영혼 끝없이 서린 그 슬픔은 바로 나의 슬픔이고 가장 오래된 외로움이야. 오래전 세상이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해온 외로움이지. 태초에 신조차 견디지 못하고 세상을 창조한 고통이란다. 네가 매일 울면서 살아온 것은 네가 살아있기 때문이야. 살아있다는 것은 외롭다는 것이니까.”
거스름이 진 입술이 상처처럼 제 뺨을 스쳤습니다.
“그래서 우린 항상 같은 세계에 있단다. 영원히.”
어떻게 그런 거짓말을 그토록 진심으로 할 수 있었을까? 피터. 당신은 정말 거짓말쟁이야.
우리는 이제 영영 헤어지리라. 두 번 다시 보지도 만나지도 못하리라. 그는 공허로 사라지고 나만이 형벌로 남아 땅 위를 헤매리라. 이제껏 당신의 품에 안겨 울고 웃었을 나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가장 교활한 악마라던 당신은 언제 이렇게 무너졌나. 이제 모든 게 끝났음을 우리는 알고 있었습니다. 끝내야 한단 것 또한. 심장이 찢어질 듯한 고통이 저를 사로잡았고 입안에 피맛이 났습니다. 저는 목이 메어 겨우 목소리를 쥐어 짜냈습니다.
“사랑해요.”
“그래, 내 사랑. 영원토록.”
피터는 지친 얼굴로 웃었습니다.
“너를 위해서라면 날 배신하마. 사랑은 고통임을 알지만 난 내 힘을 모두 버려서 널 데리러 왔어. 널 끌어안기 위해.”
그것은 최후의 약속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게 하는 사랑.
저는 그를 찔렀습니다. 그가 낮게 신음을 내며 저를 더 세게 안았습니다. 저는 단단한 심장 끝까지 칼을 박아 넣은 뒤 고개를 꺾고 그에게서 간절한 피 냄새를 맡았습니다. 그는 피를 흘리고 있었어요. 인간처럼. 손바닥과 손등을 타고 뜨거운 피가 흘렀습니다. 그는 제 눈을 똑바로 마주 보고, 천천히, 오래전 파랗고 어두운 내 침대 위로 걸어왔던 그날 밤처럼 다정하게 미소 지었습니다.
“사랑해.”
그는 제 입술에 키스했습니다. 쓴 맛이었습니다. 비린내가 났습니다. 저는 엉엉 울고 싶었지만 맞물린 입술에서는 흐느낌만 터져 나왔습니다. 그게 마지막이었어요.
나의 피터.
아아. 아. 하나님. 이제 그만할래요. 멈춰주세요, 죽을 것 같아요. 당신을 저주합니다. 당신이 미워요. 죽어버려요! 아니에요, 살려주세요. 용서해주세요. 아니, 아니, 잘못했어요. 벌을 주세요. 저는 정신적으로 붕괴되어 있습니다. 저는 더 이상 이런 감정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감정에 빠져 있단 것은 압니다. 저는 그를 사랑합니다. 제가 그를 사랑했습니다.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사실 당신은 우리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불행을 즐기는 게 아닌가요? 인간이 죄를 짓는 동안 당신은 무엇을 했느냔 말입니다! 당신이 악마와 다른 점이 무엇이죠? 그는 나를 위해 죽었습니다. 내가 그를 죽였어요.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진심이 아닙니다. 네…… 실수예요. 왜 저는 영원에 집착했지요? 어차피 없는 것을. 아아, 모두 사라져버려라. 이것은 심장이 부서지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영원해봤자 고통이 영원할 뿐입니다. 누구나 듣고 싶은 얘기만 듣는 법이죠. 시간이 흐른 뒤 거짓과 진실, 천국과 지옥에서 남는 건 무엇입니까? 몰라요, 모릅니다, 저는. 영원이라니. 웃기네요! 네. 네. 어쩌면 그는 내가 꾸며낸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야기꾼입니다. 내 인생을 팔고 있죠. 진실이 아니라서 실망했나요? 나는 다 거짓이었으면 좋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