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과 가까워져 꽤나 더워진 날이었다. 허나 그런 바깥과 상관없이 기계로 인해 사무실은 쾌적한 기온을 유지한다. 그리고 그 사무실에 있는 한 여성은 푹신한 소파에 느긋이 앉아 있다. 아니, 아래로 살짝 쳐진 두 어깨와 핏기가 없어 창백한 얼굴은 그녀의 몸 상태가 좋지 않음을 알려주고 있다. 즉, 그녀는 느긋이가 아닌 힘없이 앉아 있는 것이다.
"사유라."
희미한 그녀의 숨소리만이 퍼지던 공간에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문을 여는 동시에 여성을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이름을 부르는 낮은 목소리. 그 부름에 감겨있던 눈이 떠지더니 연갈색의 눈동자가 드러난다. 투명한 눈동자에 비쳐지는 남자의 모습은 꽤나 인상적이었다. 왠만한 남성들보다 큰 키, 건장한 몸, 누가 보아도 인정할 만한 외모를 가졌다. 허나 이것들이 인상적인게 아니었다. 어떻게 물들인 것인지 깔끔하고도 선명한 분홍색의 머리카락이 강렬한 인상을 들게 만들도록 했다. 그러한 상대방에도 사유라라 불린 여성은 그리 놀라거나 신기해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그저 말 대신 옅은 미소로 대답을 대신한다.
"힘도 많이 없으면 원래 모습으로 있을 것이지. 왜 굳이 인간화를 하고 있는거냐."
"습관이랑 비슷한 거에요."
"인간화가 습관이라는 서큐버스는 너뿐일거다. 일단 물이나 마셔라."
"고맙습니다."
둘의 대화 속에서 위화감이 느껴지는 단어가 나온다. 그 대화는 여성이 악마들 중 한 존재인 서큐버스라는 사실을 담고 있었다. 별 다른 특징이 느껴지지 않는 그녀의 모습은 영락없는 인간이다. 허나 본인의 태도로 보아서는 거짓이 아닌 듯 했다. 태연한 상대방의 태도에 오히려 작은 한숨을 내쉰 쪽은 남자였다. 그는 그녀의 옆에 앉아, 자신의 손에 들린 컵을 건낸다. 아니, 건내려고 했었다.
"좋은게 떠올랐다."
"좋은 거요?"
다가오던 컵이 멈추더니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고 말하는 그에 여성은 미약하게 고개를 갸웃한다. 그 모습에 어딘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남자는 컵에 든 물을 자신의 입안으로 털어 넣는다. 생각지 못한 행동에 놀람보다는 의아함으로 바라보던 사유라는 자신의 턱을 잡는 손에도 얌전히 있는다. 허나 곧 서서히 다가오는 그의 고개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아챈다. 그것은 그녀의 기준에서는 부끄러운 행동이기에 도망치려 했으나,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뒤로 물러나기도 전에 자신의 입술에 닿은 그의 입술에 굳어버린 사유라. 그는 닫혀진 입술에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슬쩍 잡는다. 생각지 못한 접촉에 미약하게 놀란 그녀는 입술을 살짝 벌린다. 그러자 그 틈으로 흘러 들어오는 물과 기운을 삼키게 된다. 더불어 물을 모두 마신 후에 이어지는 키스에 그녀의 입술이 해방된 것은 한참 후였다.
"흠, 이제야 조금은 멀쩡한 안색이 되었군."
"좋은게 이런 건가요?"
"물도 먹이고, 정기도 먹이고, 키스도 하고... 일석삼조잖나."
그녀의 안색을 살피는 그는 만족스런 미소를 짓는다. 허나 사유라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온 목소리엔 미약한 불평이 담겨 있다. 그걸 인지함에도 남자는 뻔뻔함과 능글함을 두른 당당한 태도를 보인다. 그 모습에 어이없어하는 서큐버스다.
"보로스, 저는 정기를 달라고 하지 않았어요."
"내가 너의 허락없이 정기를 준게 한 두 번도 아니지 않나."
"정말이지, 제멋대로인 사람. 그리고 특이한 사람이에요. 당신은..."
"너도 특이한 서큐버스란걸 잊지마라. 그런 의미에서 우리 둘은 잘 어울리는 한 쌍이지?"
이제 와서야,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그녀의 불평에 남자는 태연할 뿐이다. 오히려 그는 그녀의 이마에 입맞춤하면서 낯간지러운 질문을 던진다. 사유라는 그런 그에 놀란듯 하더니, 이내 '그렇네요.' 라고 답한다. 보로스는 귓가에 들려오는 연인의 작은 웃음소리에 함께 웃는다.
그렇게 둘이서 평온한 시간을 보내던 중 보로스가 갑자기 입을 다문다. 어딘지 진지해진 그의 분위기에 사유라도 조용해진다. 그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다시 연다.
"인간들의 악몽을 먹어주는 일은 이제 그만둬라."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그럴 수 없어요."
"그건 네 몸에 득이 되는 것이 없다. 오히려 독이다."
"그렇다 해도 그만두지 않아요."
방금까지의 따스하고도 훈훈한 분위기는 사라진다. 둘 사이에 흐르는 공기는 팽팽해진다. 왠만한 일에는 물러나주거나 들어주는 사유라인데, 이 일에 관해서는 절대로 뜻을 굽히지 않는다. 그것이 자신의 존재를 위험하게 할지라도 말이다. 위험을 즐긴다는 그런 취미나 게임이란 이유도 아니다. 그럼에도 수명을 줄일 수 있는 독을 삼키는 서큐버스에 인간은 이해하지 못한다. 천사라면 모를까, 악마인 서큐버스가 이런 선택을 하는 경우는 없었다. 하다못해 인간 중에서도 극히 드물다.
"나는 네가 사라지길 원하지 않는다."
"몇 번이나 말했지만, 그리 쉽게 사라지지 않아요. 벌써 100년도 넘게 이렇게 살아 왔는데 문제 없었어요."
"지금은 몰라도 후에는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거다. 그리고 그런 말로 날 설득할 생각은 포기하는게 좋을거다."
"...... 저를 걱정해주는, 아껴주는 마음은 언제나 고마워요. 하지만 저는 그만두지 않을 거에요."
서로 물러날 의지를 보이지 않는 둘. 팽팽한 공기는 풀리지 않는다. 보기 드문 둘의 모습을 지인이 봤다면 놀람과 동시에 피했을 거다. 그만큼 이런 때의 둘은 잘못하면 커다란 불똥이 튀기 때문이다. 한참을 서로 노려, 아니 바라보았을까. 이번에도 먼저 입을 연건 보로스다.
"네가 그렇게까지 물러나지 않는다면 강제적으로라도 못하게 할거다."
"강압적인 방법으로 절 막으려는 건가요."
"널 잃지 않을 수 있다면."
"아무리 그런 이유에서라도 저는 납득하지 않아요. 이건 제게 있어 절대로 물러날 수 없는 일이에요."
"나도 물러나기 싫다."
분위기는 점점 조금 더 험학해진다. 이것은 정말로 희귀한 일이다. 어느 선에서 둘 중 한 명이 타협을 할 텐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다. 다시 침묵을 두르고 서로를 보는 둘. 이번에는 사유라가 먼저 입을 연다. 작은 입술의 틈으로 나온 목소리는 그녀의 것이라고는 너무도 차가운 목소리였다.
"아아, 그런가요."
"......"
"계속 얘기 해봐야 서로 지치기만 하니, 한 동안은 거리를 두죠."
"뭐?"
연갈색의 눈동자가 마치 보석과도 현광등에 빛나더니, 그녀의 모습이 바뀐다. 헐렁하게 입은 흰색의 블라우스는 검은색의 어깨가 드러난 블라우스로, 청바지는 검은색의 핫팬츠로 바뀐다. 그리고 머리에는 보라색의 2개의 뿔이 생겨난다. 바뀐 모습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일까. 사유라는 방금까지와는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부드러웠던 그녀는 어디를 간 것인지, 날카로움과 고고함을 두르고 있다. 그 모습이 서큐버스인 그녀의 본모습이었다.
"오늘 배 채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유라 잠..."
감사함은 담겨 있었으나 웃음기 하나 없는 그녀를 잡으려고 한 보로스. 허나 사유라는 다가오는 손을 피하더니 사라진다. 제 눈앞에서 사라진 그녀가 이미 다른 곳으로 간 것을 안 그는 뻗었던 손을 거둔다. 그리고는 눈가를 손으로 덮어 소파의 등받이에 깊이 몸을 기대며 깊은 한숨을 내쉰다. 그만이 남은 공간 속에서 울리는 것은 방금까지 들리지 않던 에어컨 소리뿐이었다.
***
인적이 없는 어느 공원. 멀리서 차들의 소리만이 들려오는 그곳의 한 나무 위에 무언가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양이일거라 여기겠지만...
"배고파..."
밥을 챙기지 못한 서큐버스가 공복에 힘없이 엎드려 있다. 사실 그녀는 나름 밥을 챙겼지만, 그것은 정기가 아닌 인간의 악몽들이었다. 원래는 사람의 정기를 먹어야 하는 존재인데, 거의 영양가가 없는 악몽을 먹은거다. 공복은 채울 수 있으나 그것은 일시적이며, 영양가도 없기에 사유라는 대부분의 시간은 기운이 없었다.
"이러고 있는거 오랜만이다."
나뭇가지 아래로 한 팔을 축 늘어뜨린채 중얼거리는 그녀. 그와 만나기 전, 자주 자신이 이렇게 지냈던 과거를 떠올린다. 익숙함과 동시에 묘한 그리움을 느낀다. 동시에 두려움을 느낀다. 다시 돌아갈지도 모르는 과거의 삶을 사유라는 반기지 못한다.
"서큐버스인데도 이렇게 나약하다니... 역시 어중간하구나."
작게 중얼거린 목소리는 이내 끊긴다. 눈꺼풀을 닫아 어둠 속에 들어간다. 절로 오래 전의 과거를 회상하게 된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자신의 정체도 모른채 인간과 살았던 시절. 악마의 시간으로 따지면 짧은 시간을 인간으로서 살았던 순간들을 떠올린다. 그리움과 후회, 미안함, 애틋함이라고 배운 감정들을 느낀다. 되돌아 갈 수 없는 과거에 여전히 묶여있는 자신을 느낀다. 그리고 그로인해 연인에게 보인 태도에 환멸감까지 느낀다.
"나 같은 어중간한 존재는 역시 사랑은 무리일까."
"왜 멋대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냐."
어둠 속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그녀는 눈을 뜬다. 그러자 거기엔 목소리의 주인이자, 방금까지 생각하고 있던 존재가 자신을 올려다 보고 있다. 다시 만나러 가기 두려웠던, 어쩌면 이제 만나지 못할거라 여긴 그가 눈앞에 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사유라는 아무런 말도 못한채 바라볼 뿐이다. 보로스는 말없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녀를 향해 입을 연다.
"미안하다."
"......"
들려온 사과의 말. 거기서 언제나 짓궂은 행동 뒤에 들려온 사과들과는 틀린 무게감을 그녀는 느낀다. 딱히 그 말들에서 진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지금의 것이 너무도 진심어려서 놀란다. 악마들도 쉽게 굴복시킬 수 있는 인간이 자신에게 사과하고 있다. 착각일까, 자신을 바라보는 푸른 눈이 너무도 괴로움에 지쳐 보였다.
"네가 알다시피 나는 악마의 손에 키워졌다. 그래서 다른 인간들이나 존재들이 느끼는 감정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패턴이나 그 성질은 알아도 나는 아직 이해하기 어렵다."
"알고 있어요."
"그럼에도 너를 사랑하게 된거다. 믿지도 않던 감정을 가진거다. 처음으로 누군가를 진심으로 소중히 여기고 싶어졌다."
"... 알고 있어요."
"네가 너무 소중해서, 내 곁에 두고 싶어서... 나는 너에게 있어 한없는 이기적인 생각을 했다. 미안하다. 너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해서..."
감정에 대해 이해하기 어렵다는 그. 하지만 지금 들려오는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것은 선명한 감정들이었다. 후회, 미안함... 그리고 자신을 향한 사랑... 아마 본인은 자각하지 못했으리라. 그는 꽤나 감정에 익숙해진 것을... 아니,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을... 아마 이것 또한 어리석은 인간의 둔함이리라. 그리고 자신도 어리석다. 사랑도 제대로 모르는 악마가 그런 인간을 사랑하게 되었다. 기쁨을 느끼고 있다.
참으로 웃기는 장면이 아닐까 하고 사유라는 생각한다. 인간의 손에 길러진 어중간하게 감정을 알게 된 서큐버스, 악마의 손에 길러진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 이런 둘이 만나 연인이 됐다. 보통의 연인들의 싸움과는 틀리지만, 싸움도 해서 이렇게 어느 한 쪽이 사과한다. 소설에서나 써질만한 일이다. 허나, 이미 자신들에게 있어 현실이다. 그게 또 어찌할 수 없이 기쁜 그녀다.
"당신은 이런 제멋대로인... 인간으로도, 서큐버스로도 어느 한 쪽을 제대로 고르지 못하는 저라도 괜찮은건가요?'"그렇게 따지면 나도 인간도, 악마도 되지 못하는 존재다."
"... 그럼 저희 둘 다 어중간한 존재군요."
"그리고 잘 어울리는 한 쌍이지."
자신의 질문에 같은 존재라고 답해주는 상대방. 그리고 싸우기 전에 들었던 말을 다시 한번 해온다. 여전히 그렇게 생각해주는 그에 사유라도 같은 대답을 한다. '그렇네요.' 라고 답한 후, 작게 소리내어 웃는다. 그도 함께 웃는다. 다시 돌아온 부드러운 공기가 둘을 감싼다.
보로스는 사유라를 향해 팔을 벌린다. 그녀는 주저없이 그 팔 안으로 떨어지듯 안긴다. 한달만의 포옹은 따스하다고 느끼던 그녀는 제 몸을 이곳저곳 만지는 손길에 놀란다.
"저기 보로스?"
"어째 더 가녀리진 것 같은데..."
"그럴리가요. 서큐버스인데 살이 빠진다거나 그런 일 없어요."
"아니다. 더 가벼워졌다."
인간이라면 모를까, 서큐버스가 살이 빠지다니... 말도 안되는 말이지만, 너무도 확신에 찬 보로스의 목소리에 더 이상 뭐라 말하지 않는 그녀다. 아니, 그것보다 잠시 잊고 있던 공복에 되살아나 슬슬 곤란하게 된다. 맡아져오는 감미로운 향기에 그로 인해 알아버린 달콤한 식사를 떠올린다. 잘 억눌러 온 본능과 함께 사랑하는 이를 향한 갈망이 고개를 든다. 그걸 억누르려는데 입술에 무언가 포개진다. 그리고 곧 입 안으로 넘어오는 달콤한 기운을 저항할 수 없이 삼키게 된다. 단, 한모금을 마시자 떨어지는 입술. 입맛만 돋군 그에게 사유라는 조금 원망어린 시선을 보낸다.
"또 갑자기..."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잖나. 것보다 배고프지?"
"......"
"적어도 2주일에 한번은 내게서 정기를 먹었던 너다. 한달이나 악몽만 먹었으니, 슬슬 한계겠지."
"예전에는 아무렇지 않았어요."
"그럼 지금은?"
속마음과 다른 말을 내뱉은 그녀를 알았을까, 아니면 천성이라서일까 보로스는 짓궂은 말들을 늘어놓는다. 그런 그의 태도와 마지막 질문에 서큐버스는 잠시 노려본다. 허나 전혀 무섭지 않은 그 모습에 코웃음을 짓는 상대방이다. 그 모습에 결국 대답을 꺼내는 사유라다.
"당신을 원해요."
"...... 기대 이상의 말을 해주는군."
본인은 전혀 모르겠지만, 보로스는 보았다. 자신을 향한 욕망과 그로인해 드러난 본래 서큐버스로서의 힘. 또한 그 표정이며, 눈빛이며 어느 남자든 뿌리칠 수 없을만큼 매력적이었다. 그에게는 악마의 힘은 통하지 않지만, 그녀는 별개다. 악마의 힘이 있든 없든 치명적인 존재다. 그렇기에 본인도 모르는 사이 흘린 유혹에 넘어간다. 제 연인의 사랑스러움에 그는 웃는다.
"그럼 오늘 밤은 배가 가득찰 정도로 어울려주마."
"아니, 그 정도까지는..."
"나중에는 배가 부르다면서 울어도 놓아주지 않을거다."
"......"
그의 거짓 하나 없는 눈빛과 목소리에 사유라는 다음날의 자신을 쉽게 떠올리 수 있었다. 보로스의 품 안에서 하루종일 있을 자신을 말이다. 배는 빵빵한채 언제나랑 다른 피곤함으로 기절한 모습을 머릿속에 그린 서큐버스는 미묘한 미소를 짓는다. 그런 모습에 상관않고, 그는 그녀의 이마에 입맞춤한다. 너무도 상냥한 입맞춤을 한 연인을 보자, 거기엔 누가 보아도 행복한 미소를 짓는 남자가 있었다. 그게 자신 때문이라 생각하자, 결국 그녀 또한 행복해져 작게 웃어버린다. 그리고 서로가 어중간한 존재라고 말한 둘은 함께 공원을 빠져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