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은 현대가 아닙니다.
*트리거 소재가 있습니다. (체벌) 초반부에 있습니다….
응, 나는 널 잡아먹지는 않을거야. 걱정 마.
어렴풋이 꿈에서 들려왔던 말이었다. 꿈에서 들은 것 치곤 바로 옆에서 말한 것 처럼 생생하게 들렸다. 참 이상하다. 얼마 전 부터 계속, 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는 목소리는 아닌 것 같았다. 그렇지만 요루미는 낯설지가 않았다. 아직 달빛이 창문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해가 뜨기까지는 한참이나 멀었다. 다시 잘까? 잠들기에는 정신이 말짱하다. 조용한 밤에는 귀뚜라미가 우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그녀는 말똥해진 눈을 억지로 감았다가 뜨기를 반복했다. 결국 마지막에는 침대에서 일어나버렸다. 춥다. 그녀는 중얼거리며 몸에 이불을 둘둘 말았다. 그럼에도 한기가 느껴졌다. 추위에 약한 요루미에게는 가을이 도달해가는 새벽의 찬 공기도 차갑게 느껴졌다. 자기 전에 분명 이불을 턱 끝까지 덮고 잤음에도 한기가 느껴졌다. 얇은 이불은 이제 넣고 두꺼운 이불을 꺼내야할 듯 했다. 벌써 계절이 이렇게 되었나? 그녀는 이곳에 온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오래 된 편은 아니었다.
그녀는 처음 이곳에 왔던 날을 떠올렸다. 몇 개월 전 기억이지만 어째서인지 그녀는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이곳에 오는 길은 시끄러웠다. 무엇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기억 속에는 시끄럽다고 기억을 하고 있다. 마을이 시끄러운건지 사람이 시끄러운건지 그건 잘 모르겠다. 다만, 그 시끄러움은 그녀를 향한 것이었다. 저런 건 죽여야 해! 누군가가 크게 외친 목소리가 머리에 울렸다. 사제들의 보호 아래에 그녀는 신전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부모님은 … 아, 생각이 나질 않는다. 왜 부모님이 날 신전에 넣었지? 기억의 중간중간에는 누군가가 억지로 잘라낸 듯 끊긴 기억들이 많다. 별 탈 없이 살던 그녀가 신전에 들어온 이유는 무엇일까. 기억나지 않는 기억을 물고 늘어지며 그녀는 새벽의 소리를 들었다.
*
밤늦게 다시 잠이 든 요루미는 아침기도에 늦어버렸다. 기도 중,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가면 문 앞에서 무서운 표정을 한 사제가 있다. 요루미는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미오 사제님.”
“빨리 자리로 들어가기나 하세요.”
요루미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에 사제는 못마땅한 듯 인상을 구겼다. 미오는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는건지 항상 그녀가 말을 걸어오면 불쾌하다는 티를 팍팍 내었다. 싫다는 사람에게 매달릴 필요는 없다. 요루미의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미오는 요루미를 담당하는 사제였다. 피할 수도 없고 부딪힐 수 밖에 없다. 그녀는 미오에게 억지로 허리를 숙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기도가 끝나면 …. 자리로 들어가려던 요루미를 멈추게 한 건 미오의 말이었다. 그녀가 어떤 말을 하려는지는 요루미도 알고있다. 고개를 돌린 채로 미오를 보고있자, 미오는 말을 이어나갔다. 제 방에 한 번 들리고 가세요.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빈 자리로 걸어 들어갔다.
*
나무로 만들어진 문은 낮은 소리를 내며 닫혔다. 미오의 방에서 나온 요루미는 곧장 방으로 향하려고 했다. 종아리에서 화끈화끈한 감각이 발걸음을 몇번 멈추게 했다. 신전 안은 엄격했다. 정해진 시간에 늦거나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사제는 회초리를 들었고, 요루미는 종아리를 내보일 수밖에 없었다.
평소라면 아침기도 후 교리수업을 받았겠지만, 곧 다가오는 마을의 축제준비에 신전 역시 축제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리수업은 없었다. 흥미도 없는 것을 강제로 앉아서 듣는 일은 고역이었다. 두꺼운 책에는 어려운 말이 가득 있었고, 수업을 가르치는 사제 역시 어려운말들만을 내뱉었다. 애초에 신전으로 일방적으로 끌려온 요루미가 수업 따위에 흥미가 생길 리가 없다. 방으로 돌아온 요루미는 치마를 걷어 올려 종아리의 상태를 확인했다. 하얀 살결에 길다랗게 빨간 자국이 남아있다. 어떤 곳은 피가 맺혀있다. 그녀는 약을 책상에서 꺼내었다. 그 약은 제 또래의 사제가 준 것이었다. 저번에, 미오의 방에서 체벌을 받고 나오던 그녀는 앞에 서 있던 사제와 눈이 마주쳤다. 사제는 쭈뼛거리며 약을 건낸 뒤에 바로 그 자리를 떠났다. 멀뚱하게 사제의 뒷모습만을 보던 요루미는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한 것이 생각났다. 다음에 만나면 고마움의 인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 사제는 계급이 낮은 사제인지라 개인적으로 만날 시간이 없었다. 멀리서 눈이 마주쳐도, 그저 가볍게 목례만 할 뿐이었다.
“먀아옹 .”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린다. 창문 쪽으로 눈을 돌리면 까만색의 물체가 기웃거린다. 그녀는 창문을 열었다. 들어올래? 그녀는 고양이의 호박색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을 쳐다본 고양이는 사뿐한 발걸음으로 걸어 들어왔다. 얼마 전에 알게 된 이 고양이는 늘 이렇게 찾아왔다. 창문을 두드리고, 울음소리를 낸 뒤에 창문을 열어주기를 기다렸다. 책상 위에 자리를 잡곤 그녀를 빤히 쳐다보는 게 그 고양이가 하는 일이었다. 요루미는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릉고릉 소리를 내며 책상 위에 발랑 누워 배를 보였다. 그녀는 그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고양이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녀는 물 한 컵을 떠서 고양이에게 가져다주었다. 고양이는 기다렸다는 듯 일어서서 물을 먹었다. 이 고양이는 이상하게도, 요루미에게 오면 물만 먹었다. 빵조각이나 잘게 자른 육포를 건낼 때에는 쳐다도 보지 않던 고양이가 물에는 관심을 보였다. 보통 고양이들은 물을 싫어하지 않았나? 요루미가 봤던 고양이들은 그랬는데 눈 앞의 까만 고양이는 예외인 듯 했다. 고양이가 물을 먹는 사이에 그녀는 약을 바르기로 했다. 치마를 무릎까지 올리자 가느다란 다리가 드러났다. 양 종아리에는 빨간 자국이 남아있다. 그녀는 피가 난 곳에 약을 바르는 도중, 시야에 까만 물체가 왔다 갔다 하는 게 보인다. 고양이었다.
“왜 그래?”
먕! 요루미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울음소리를 내며 고양이는 그녀의 다리에 제 몸을 문질러대었다. 부드러운 촉감이 발치에서 느껴졌다. 고양이는 위로를 하는 듯 했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턱을 살살 긁어주었다. 언뜻 고양이의 눈이 붉게 변한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고르릉,하는 기분 좋은 고양이의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
황금빛으로 변한 들판들을 모두 수확을 하고 나면 사람들은 다시 축제를 준비하기에 바빴다. 마을의 추수에 감사하기 위해 사람들은 수확된 것들로 축제를 열었다. 마을의 분위기는 점점 달아올라갔지만 그에 반해 신전은 축제가 왔음에도 조용한 분위기를 이어나갔다. 요루미는 허리까지 오는 긴 미사포를 머리에 둘렀다. 아직 그녀가 견습사제임을 의미했다.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있자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먀아옹. 그리고 고양이 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그녀는 익숙하게 창문을 열었다.
“나 이제 곧 나가야 되는데… 야옹아. 내일 다시 올래..?”
먕? 고양이는 발라당 누워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동그랗고 맑은 호박색 눈에 그녀는 당해내지 못했다. 그래….그럼 조금만 있다가 가자… 그녀는 쪼그려 앉아 한참동안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아슬하게 축제 시간 전에 도착한 요루미는 바쁘게 시간을 보냈다. 신전 측에서 주최하는 건 정점인 등불 올리기였다. 밤 11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면, 사람들은 신전에서 받아온 등불에 소원을 적고, 그 등불을 하늘로 올려 보낸다. 요루미는 견습사제의 위치라 허드렛일이 가장 많았다. 다 떨어진 잉크를 가져오거나, 어질러진 책상 위를 치우고 걸레를 빨아오는 일이 가장 많았다. 쌀쌀해진 날씨에 반복적으로 차가운 물을 닿으니 손이 텄다. 손이 튼 곳에서 피가 보일 때쯤에야 축제는 끝이났다.
신전의 사제들이 뒷정리를 하고 돌아오는 시간은 이른 새벽이었다. 손에 짐 하나 없는 사제들은 뭐가 좋은지 꺄르르 얘기를 나누며 걸어가고 있다. 짐은 커다란 가방에 억지로 구겨 넣어 요루미에게 맡겼다. 무거운 건 아니지만, 애초에 무게가 나가는 물건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부탁을 해서 미리 신전에 가져다 놓았고, 사제들이 들고갈 수 있는 물건들만 남겨놓았는데 이 사제들은 커다란 가방에 짐을 구겨 넣어 요루미에게 들라고 한 것이다. 신전에 점점 더 가까워질수록 요루미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내가 짐꾼인가? 짜증나, 진짜...
속으로 말을 내뱉고만 있자 사제들은 하나둘씩 요루미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요루미 양은 엄청 예쁘지 않아? 만약 신전에 들어오지 않았으면 남자들에게 인기, 엄청 많았을 것 같아~”
“그렇지? 곧 결혼할 나이기도 하니까 주위에서 청혼 같은 것도 많이 들어오고... 어머, 요루미양 미사포는?”
“네? 어?”
바로 앞에서 걸어가는 사제의 말에 요루미는 그제야 미사포를 나두고 온 것이 생각났다. 긴 미사포에 잉크가 묻어 물로 대충 빨아두고 나무에 걸어두고 온 것이었다.
“제가 가서 찾고 올게요! 그보다… 이건마저 들고 가 주세요!”
그녀는 들고 있던 커다란 가방을 내려두곤 돌아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갔다. 남은 사제들 중 먼저 나서서 짐을 들겠다는 사람은 한동안 나오지 않았다.
*
역시 밤의 마을은 무섭다.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건 둘째 치고 온 사방이 어둡다. 빛이라곤 달빛뿐이다. 왔던 길을 생각해내며 겨우 도착했지만 어떤 나무에 걸었는지도 제대로 기억이 나질 않는다. 분명 가까이 있던 나무에 걸었던 것 같은데… 그녀는 주위를 배회하며 살폈다. 그냥 갈까? 미사포가 없다면 또 미오 사제에게 혼날 것이고 그러면 또 종아리를 맞을테고… 짧은 생각에 빠지던 중, 그녀는 골목길에 누군가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달빛이 비쳐 어렴풋하게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누구 있으세요?”
그녀는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돌아오는 것은 침묵뿐이었다. 잘못 봤나? 그녀는 궁금한 것을 참을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녀는 골목길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발걸음을 옮길 때 마다 형체가 점점 더 뚜렷하게 보인다. 남자, 인 것 같다. 얼굴쪽을 쳐다봐도 빛이 없어 얼굴을 확인할 수도 없다.
“저기요? 죄송한데, 혹시 여기서 미사포…….음… 길다란 천 같은거 못 보셨어요?’
“..? 나? 지금 나한테 말한 거야?”
“ 네.. 그런데요..”
어라, 익숙한 목소리다.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다. 그녀는 의아함을 숨기며 다시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어쨌든, 보셨어요? 남자는 대답대신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가까워질수록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제일 먼저 보이는 건 눈이었다. 달빛에 비쳐 빨간색의 눈동자가 번뜩였다가 다시 어둠 속으로 숨어버렸다. 조금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호기심이 들어 그녀는 눈동자를 찾아 헤매었다.
“아, 네가 찾는 건 이거? 맞아?
“...앗, 네..!”
남자는 요루미의 앞에 미사포를 흔들어 보았다. 그녀는 반가운 표정으로 손을 뻗었지만, 남자는 미사포를 들고 있던 손을 내렸다. 어? 그녀는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웃음기가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예전이랑 똑같네. 변한 게 없어. 요루!”
“..... 저,희가 예전에 알던 사이였나요?”
남자의 말에 요루미는 당황한 듯 했다. 신전에 들어오기 전, 가까이 지내던 남자아이가 있던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남자아이는 없다. 당황한 그녀의 앞에 남자는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제야 남자의 얼굴이 잘 보였다. 머리카락은 남자의 눈 색과 같다. 빨간색의 머리카락이지만 눈과는 다르게 섬뜩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리고 머리에는 …
“...!!!”
“아… 쉬이.”
남자는 시선을 눈치 챈 건지 그녀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놀란 그녀는 동그란 눈을 깜빡거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남자의 머리에는 뿔이 있었다. 그의 머리색과 같은 색이다. 수인? 그녀의 생각을 읽은 건지 그는 웃으며 말을 꺼냈다.
“나는 악마야. 너, 나를 수인이라고 생각했지?”
“..??”
“나를 처음 만났을 때에도 그랬어. 정말, 변함이 없네!”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다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의 반응에 악마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악마는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내렸다.
“신전 측에서 나와 관련된 기억을 모두 지운건가…. 음…”
“저랑 당신이 알던 사이라고요? 말도 안…”
“요루미양~ 여기 있어?”
악마에게 한껏 질문을 하려던 요루미는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입을 닫았다. 돌아가야 하지만 물어볼 것은 많다. 어떡하지? 악마라해도 별로 위험해보이지는 않는 얼굴이다. 물어봐도 괜찮지 않을까? 그녀는 악마의 손에 있던 미사포를 뺏었다.
“일단… 아… 어떡하지 진짜… 물어볼 건 많은데...”
“날 어떻게 만날지 고민하는 거지? 그거라면 걱정 마! 나, 네가 살고 있는 곳은 알고 있으니까.”
“네?”
“까맣고 호박색 눈동자의 고양이 알지? 그게 나야.”
“...허?”
그녀는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뱉어냈다. 악마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왜? 악마의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그녀는 뛰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