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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것은 빨리도 자란다. 오랜 세월을 살아야 하는 자신들에게 어린 것의 성장이란 찰나에 가까웠고, 그건 같은 요괴의 새끼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분명 제가 주워왔을 땐 무는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솜털뭉치일 뿐이었는데, 어느 틈에 성체와 비슷한 크기로 자라난 걸까. 인간보다야 훨씬 성장이 느리긴 했지만, 에노키의 유년시절은 빨리도 지나갔다. 타가미는 못내 그것이 아쉬웠지만 결코 그 감정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타가미, 이것 봐요! 여우불 만들었어요!”

 

늦은 밤, 막 자신의 신사에서 은신처로 돌아온 그를 반기는 것은 인간의 모습으로 여우불을 만들고 있는 에노키였다. 푸른색이 영롱한 불꽃은 분명 크기는 작지만 일반적인 불덩이와는 다른 기운을 뿜어내고 있다. ‘이젠 저런 것도 할 줄 아는 건가.’ 조금 의외이긴 하지만, 호들갑을 떨 정도는 아니다. 더 엄청난 여우불도 봐온 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대꾸했다.

 

“크기가 너만 하네.”

“뭐예요, 그거. 지금 나 작다고 하는 거죠?!”

“100살 가까이 먹으면서 계속 바보천치로 있나 했더니, 이제 이 정도 말은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나. 다행이네.”

“으으으!”

 

펑. 집중력이 흐려지자 여우불도 금방 사라져버렸다. 뭐가 그리도 분한지 두 팔을 휘적거리며 분을 삭이던 에노키는 한 바퀴 근사하게 구르더니, 꼬리가 둘인 여우의 모습으로 변했다.

 

“나 이제 다 컸어요! 꼬리도 둘이나 된다고요!”

“겨우 둘?”

“곧 세 개가 될 걸요?”

“퍽이나.”

 

무표정으로 비웃은 타가미는 가면을 벗고 아무 곳에나 주저앉았다. 오늘은 유독 드나드는 사람이 많아 바빴는데, 무엇 때문인지 기분도 그리 좋지 않다. 피곤해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런 것 치곤 몸이 그다지 무겁지 않았다.

 

“잠이나 자라. 오늘도 싸돌아 다녔을 텐데.”

“…어떻게 알았어요?!”

“너 말고 이 산에서 사고를 칠만한 요괴가 어디 있냐.”

 

저 말은 비유가 아니라 사실이었다. 텐구가 주인인 신사가 있는 산. 산짐승들마저도 눈치를 보고 이매망량은 근처에 얼씬거릴 생각도 하지 못하는 곳이 바로 이 곳이다. 타가미는 비록 제가 모셔진다는 입장에 있는 것을 그리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어도 제 신사가 있는 산에 불경한 것이 들어오게 내버려 둘 인물이 아니었다. 본래라면 이런 새끼 요호는 발도 들일 수 없지. 에노키가 여기 있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타가미가 직접 주워와 길러온 요괴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산 밖으로 못 나가게 하잖아요? 그럼 산에서 놀 수밖에 없고!”

“요즘은 요괴가 막 나돌아 다녀도 되는 시대가 아니니까.”

“타가미는?”

“나도 산 밖으로는 잘 안 나간다만.”

 

애초에 지금 세상은 요괴들이 막 활개 칠 수 있는 조건이 못되었다. 괴담과 전설, 그리고 신사들로 유지되는 미지에 대한 믿음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빈약하다. 더 이상 인간들은 요괴를 믿지 않고, 믿는 쪽이 오히려 괴짜로 취급된다. 아예 믿음이 사라지지 않은 건 다행이지만 이런 시대엔 백귀야행이라도 열리지 않는 한 요괴가 도시를 떠도는 건 미친 짓이지. 아니, 요괴가 아니라 신이라고 해도 무모한 짓이다. 도시를 방황하는 건 악령이나 이매망량으로 족했다. 자신들은 그저 이런 곳에서 숨이나 쉴 수 있다면 그만이다. 그리고 어차피 자신은 이 산의 주인이기 때문에 자리를 쉽게 비울 수도 없었다.

 

“…근데 진짜 나가면 안 돼? 잠깐도 안 될까요?”

“…….”

 

‘하아.’ 에노키의 간절한 부탁에 타가미가 한숨을 내뱉었다. 도대체 몇 번을 말해줘야 제대로 알아먹을까. 매번 나가고 싶다고 할 때 마다, 나이를 먹어가며 신통력이 생길 때 마다 가르쳐 줘도 소용이 없다.

 

“에노키, 이리 와 봐.”

 

타가미가 저렇게 부르는 건 지금부터 잔소리를 하겠다는 뜻과도 같다. 잠깐 멈칫한 에노키는 다시 한 바퀴를 굴러 인간의 모습이 되더니, 슬그머니 그의 옆으로 다가가 정좌를 하고 앉았다.

 

“내가 뭐라고 했지?”

“산 밖은 위험하다, 인간은 상종 안 하는 게 최고다!”

“잘 기억하네. 그런데 나가고 싶다고?”

“하지만 궁금하고….”

 

그래. 늘 대화는 이런 식으로 돌아왔지. 저렇게 나가고 싶다고 우는 소리를 해도 결국 나가지 않는 걸 보면 완전히 바보는 아니었지만, 만약 무모한 짓이라도 했다간 기껏 구한 목숨이 아무 의미가 없게 되지 않는가. 동족의 공격을 받아 죽어가던 어미 품에서 울던 갓난쟁이시절의 에노키를 잠깐 떠올린 타가미는 고개를 젓고 누워버렸다.

 

“난 잔다. 너도 자라. 인간 구경이 그렇게 하고 싶으면 내 신사에 오는 인간들이나 구경하던가.”

“네….”

 

대답은 잘 한다. 제 말에 금방 풀이 죽은 그녀를 가만히 보고 있던 타가미는 가볍게 자그마한 머리통을 쓰다듬어주고 눈을 감았다. ‘으으음.’ 잠깐 앓는 소리를 내던 에노키는 그대로 타가미의 옆에 몸을 웅크리고 누웠다.

별일이다. 그는 잠에 들기 전 자신의 옆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묘한 의문이 들었다. 에노키가 원래 이렇게 말을 잘 들었던가. 자라고 하면, 못해도 한 시간은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겨우 잠들곤 했는데.

기분이 안 좋으니 별게 다 신경 쓰인다. 타가미는 제 의문이 괜한 걱정이길 빌며 잠에 빠져들었다.

 

 

 

새벽녘에 불어오는 바람은 이 세상 것이라고는 생각 할 수 없을 만큼 차가웠다. 일찍 잠들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평소보다 쌀쌀한 바람이 거슬렸던 걸까. 타가미는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떴다.

 

“…뭐야, 지금 몇 시….”

 

자연스럽게 제 옆자리를 보며 입을 연 타가미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분명 있어야 할 존재가, 있어야 할 자리에 없다. 그것만으로도 당황스럽지만 더 아찔한 것은 은신처 근처에서 전혀 그녀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귀찮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는 가면도 챙겨들지 않고 밖으로 나섰다. 아직 해가 완전히 뜨지 않은 시간이니 마주칠 인간도 없겠지. 있다고 해도 뭘 어쩔 건가. 자신의 얼굴을 알아볼 인간들은 이미 몇 백 년 전에 다 죽었는데.

숲은 소란스럽다. 짐승도 벌레도 울지 않지만 공기가 불온하다. 타가미는 날카로운 신통력으로 불온함의 중심지를 찾아냈다. 제 신사 근처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배짱도 좋지. 어딜 감히. 타가미는 허공에서 석장을 꺼내들고 크게 팔을 휘둘렀다. 짤랑, 짤랑. 석장에 달린 고리들이 부딪히며 맑은 소리가 퍼졌다.

 

“가면은 챙길 걸 그랬군.”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린 그는 사건현장으로 날아갔다. 가까워지는 살기와 발소리들. 하나는 네 발로 뛰는 짐승의 것이고, 두 개는 두 발로 걷는 짐승의 것이다. 설마 본래 모습으로 쫒기고 있는 건가. 그거라면 아주 곤란하다. 에노키는 꼬리가 두 개라서, 누가 봐도 그냥 여우로는 보이지 않을 테니까.

 

“잡아! 빨리! 사진이라도 찍어!!”

“뛰는데 사진을 어떻게 찍어? 멍청아!!”

 

에노키를 쫒아가는 남자들은 무슨 대단한 구경거리라도 발견했다는 듯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이런 부류는 몇 번 봤다. 제 산을 심령체험 장소 취급하고 마음대로 오가며 사진을 찍는 무례한 인간들이란. 저런 것들은 신사를 오가는 진짜 신자들과 자신을 위해서라도 ‘혼쭐’을 내줘야했다. 물론 지금은, 다른 이유가 더 컸지만 말이다.

타가미는 부리나케 도망가는 에노키를 주시하다가, 그녀가 풀숲으로 뛰어드는 동시에 고도를 낮춰 땅 가까이에 다가갔다.

 

“야, 저기…!”

 

시야에서 사라진 에노키를 찾기 위해 달리던 속도를 늦춘 두 남자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커다란 그림자에 멈춰 섰다.

달을 등지고 선 인영. 새까만 날개는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크고 둔탁한 광이 나는 석장은 스산한 맑은 소리를 낸다. 누가 봐도 인간이 아닌 모습. 남자들은 이 산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기에 곧바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지만, 곧바로 그 공포 때문에 제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내 산에서 시끄럽게도 날뛰고 있군.”

 

빛나는 노을 색 눈동자 밑, 가는 입술에서 새어나오는 목소리가 기괴하게 일그러져 울려 퍼졌다. 신의 노여움이란 이런 것이겠지. 남자들은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버렸다.

 

“나가.”

“으, 으아아아!”

 

거창한 경고 같은 건 필요 없다. 어차피 이 한 마디만으로도 지금 저 침입자들의 어깨에 대량의 업이 쌓였을 테니까. 아마 곧 죽는 게 더 나았을 거라 생각하게 되겠지. 불법침입 치고는 너무한 처사일지도 모르겠으나, 침입 후 저지른 일을 생각하면 오히려 선처로 느껴질 지경이다.

 

“에노키.”

 

변조된 목소리가 아닌 평소 목소리로 호명하자, 풀숲에서 그녀가 고개를 내밀었다. 달리다가 여기저기 긁힌 걸까. 달빛이 비치는 곳으로 모습을 드러낸 에노키의 온 몸엔 생채기가 가득했다.

땅으로 내려온 타가미는 석장을 집어넣고 몸을 숙였다. 이리 와. 그렇게 말하는 몸짓이었다.

 

“…타가미…!”

“쯧.”

 

달려오며 한 바퀴 구른 에노키는 인간의 모습으로 그의 품에 안겼다. 역시 인간의 모습으로 보니 상처들이 더 선명하게 보인다. 심기가 불편해진 타가미는 그대로 에노키에게 잔소리를 퍼부으려고 했지만, 안타깝게도 입을 먼저 연 것은 에노키였다.

 

“죄송해요…! 그냥, 그냥 신사 근처에 인간이 있는 거 같아서 보러 간 것뿐인데. 갑자기 소리를 지르면서 쫓아와서… 여우불이라도 던질까 했는데 당황하니까 안 만들어져서….”

“…알았으니 진정이나 해.”

 

들어보니 정말로 마을로 갈 생각은 없어보였고, 신사 근처에서만 놀았다면 제가 뭐라 나무랄 수는 없었다. 신사로 가라고 했던 건 자신이었으니까. 그래도 설마 조심성 없게 꼬리가 두 개나 되는 본모습으로 돌아다닐 줄이야. 다음부터는 확실하게 인간 모습으로 돌아다니라고 일러줄 필요가 있어보였다.

 

“곧 아침이니까, 돌아가서 마저 자.”

“네….”

“…이래서야 언제 독립시킬지, 쯧.”

“네? 뭐라고 했어요?”

 

‘아무것도.’ 대답해 줄 생각 없다는 듯 말을 돌린 타가미는 에노키를 안아들고 땅에서 발을 굴러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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