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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인간과 뱀파이어간의 갈등이 얼마나 오래 전부터 지속되었던가. 그 문제의 답은 애석하게도 가장 오래 살아온 늑대인간 마저도 답할 수 없었다. ‘나의 선조, 그리고 그 선조 때부터도 사이가 나빴지. 숙명적인 악연이야.’ 무리의 수장인 베릭트는 어린 동족들에게 그렇게 말하고 웃었다. ‘의미를 찾는 게 무의미 할 정도로 오래 되었지만, 이유 있는 악연이지.’ 그렇게 덧붙이고 나서 담배를 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확실히, 이제 와서 이유 같은 건 어찌되든 상관없지. 데스페라도는 정찰을 위해 나갔다 돌아오는 길, 베릭트가 한 말을 곱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두 종족은 서로를 너무 죽였고, 지금도 영역문제와 복수에 얽매여 서로를 죽이려고 하고 있다. 그 와중에 분쟁의 시발점을 찾는 것이 의미가 있는 걸까. 안다고 해도, 아무도 멈추지 않을 텐데.

 

‘오늘은 조용하군.’

 

어제는 이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뱀파이어가 있어 대판 싸웠었지. 그쪽은 ‘길을 잃었을 뿐.’ 이라고 말했지만, 그걸 믿을 만큼 자신은 무른 사람이 아니었다. 싸움은 자신의 승리로 끝났고, 여기저기를 물어뜯긴 뱀파이어는 저 멀리 그들의 성채로 달아났다. 죽지는 않았겠지만, 두 번 다시 이 곳엔 얼쩡거리기도 싫을 것이다.

데스페라도는 그 누구보다도 파수꾼의 역할을 잘 수행했다. 그에게 걸린 뱀파이어는 목숨을 잃거나 다시는 늑대인간의 영토에 들어오고 싶어 하지 않았으니까. ‘같은 파수꾼이라지만, 넌 너무할 정도로 잘 하긴 하지.’ 힘 조절을 못해 늘 침입자를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처리하곤 하는 블래스터는 상대에게 제대로 공포를 심어주는 그를 진심으로 칭찬했다.

 

“낑, 끼잉.”

 

조금만 더 가면 마을의 입구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정찰을 마친 것을 자축하기 위해 담배를 꺼내 문 그의 귓가에 멀리서 들려오는 어린 짐승의 앓는 소리가 파고들었다.

아마도 인간으로 변하는 법도 모르는 어린 동족의 목소리 같은데, 어디서 소리를 내는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그 자리에서 멈춰선 데스페라도는 귀에 의존하지 않고 후각에 집중했다. 저 멀리서, 바람을 타고 피 냄새가 났다. 동족의 피 냄새와, 다른 종족의 피 냄새가.

뱀파이어인가. 아니면 인간? 어느 쪽이라도 다른 종족이 동족의 어린 것과 함께 있다면 불안할 수밖에 없다. 불도 붙이지 않은 담배를 집어넣은 데스페라도는 발소리를 죽이고 바람이 부는 쪽으로 다가갔다.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갈수록 피 냄새는 짙어졌다.

 

“옳지, 착하지.”

 

낑낑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들리는 건 처음 듣는 여자의 목소리였다. ‘이런, 뱀파이어군.’ 단지 목소리만 들었을 뿐인데 그는 상대의 종족을 정확하게 짚어냈다. 물론 이건 뱀파이어의 특성을 알고만 있다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뱀파이어의 목소리는 특별한 힘이 있어, 상대방이 누구든 듣는 상대의 정신을 빼놓곤 했으니까.

물론 자신 쯤 되는 파수꾼이라면 저런 미성에 현혹되지 않지만.

그렇게, 생각했는데.

 

“누구…?”

 

기척을 알아챈 걸까. 달래는 말을 계속해서 건네던 목소리가 자신을 향해 묻는다. 이미 들켰다면 조심할 것도 없지. 발소리를 죽여 천천히 다가가던 데스페라도는 대답 대신 성큼성큼 상대방에게 다가갔다. 어둠 속에서 보이는 그림자. 달빛도 닿지 않는 나무그림자 속에서 빛나는 것은, 자수정 색의 눈동자.

 

“어라.”

 

얼굴이 보일 정도로 가까이 다가갔을 때, 데스페라도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상대방의 시선에 무심코 행동을 멈추었다. 창백한 피부. 긴 송곳니. 검은색뿐인 옷. 누가 봐도 뱀파이어의 모습을 한 여자는 품에 다친 늑대새끼를 안고 있었다. 마치 아기를 안고 있는 것처럼, 다정하고 상냥하게.

 

“잘 됐네, 아가. 동족이 도와주러 왔어.”

“낑….”

 

총이라도 맞은 걸까. 어린 동족의 허리엔 금속과 화약의 냄새가 가득했다.

뱀파이어들은 유독 총기를 싫어하니 아마 이 여자의 소행은 아닌 것 같은데, 인간이 쏜 총에 맞은 걸까. 그렇다면 왜 이 뱀파이어는 인간에게 당한 제 동족을 구한 건가. 상황이 정리가 되지 않는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너 뭐야?”

“뭐야, 라니. 애매한 질문이네. 이름이라도 알고 싶은 거야?”

“…아, 그래. 질문을 바꾸지. 뭐하고 있는 거야? 그 애는?”

“사냥꾼의 총에 맞은 거 같아서, 총알 좀 빼주고 달래주고 있었지. 내가 한 거 아니야. 달에 맹세해 줄까?”

 

여자는 능청맞게 웃으며 하늘에 뜬 달을 가리켰다. 반달도 보름달도 아닌 애매한 모양의 일그러진 달을 힐끔 올려다 본 데스페라도가 미간을 찌푸렸다. 수상하긴 하지만, 저 말 만큼은 진짜일 것이다. 여자에게선 화약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으니까.

 

“…내놔. 그리고 꺼져. 여기가 누구의 숲인지는 알고 온 거겠지? 한 짓이 있으니 그냥 돌려보내 줄 테니까 당장 사라져.”

“너무하네, 선행을 해 줬더니 꺼지라고 하고.”

“남의 집에 쳐들어온 시점에서 아웃 아닌가? 우리 숲엔 왜 왔지? 피라도 마시러 왔나?”

 

날카롭게 쏘아붙인 데스페라도는 어린 동족을 뱀파이어의 품에서 빼냈다. 상처는 대충 응급처치가 되어있었고, 물린 흔적도 없다. 무슨 속셈인진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이 뱀파이어는 정말 ‘선행’만을 베푼 모양이었다.

적어도 피는 조금 마셨을 거라 생각한 그의 눈빛이 조금 누그러들었다. 물론 그 외에 어떤 다른 속셈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은 잊지 않았지만, 적어도 흡혈이 목적이 아니라면 죽일 이유는 없게 된 셈이니까.

 

“찾을 게 있어서 왔어. 뭐, 결국 못 찾았고 파수꾼에게 들켰으니 돌아가야겠지만?”

“내가 파수꾼인건 어떻게 안 거지?”

“당신, 자기가 얼마나 유명한지 잘 모르구나? 우리 사이에선 유명해. 잡히면 다시는 늑대 울음소리도 못 듣게 만드는 무서운 파수꾼이 있다고. 소문이랑 똑같이 생겼네. 미남이야.”

 

입을 가리고 웃은 여자는 데스페라도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기분 나쁜 시선이다. 자신을 훑어보는 보라색 눈동자가 언뜻 붉은 빛으로 빛나는 걸 본 그는 어린 동족을 고쳐 안고 으르렁거리듯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헛소리 하지 말고 가.”

“네, 네.”

 

‘엔, 거기 있나요?’ 멀리서 낯선 남자의 미성이 들린다. ‘있어요, 슬슬 돌아가요.’ 차분하게 고개를 돌려 대답한 여자는 데스페라도를 향해 샐쭉 웃고 안개처럼 사라져버렸다.

파수꾼 생활을 한 지는 오래 되었지만, 저렇게 별난 뱀파이어는 또 처음이다. 제가 아는 뱀파이어는 모두 오만하고 호전적이었으며, 상대가 누구든 피부터 마시고 보려고 했는데.

그는 아까 피우려다가 만 담배를 다시 꺼내 물고 마을로 돌아갔다. ‘매일 저런 녀석들만 쳐들어온다면 파수꾼 생활도 편할 텐데.’ 그런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면서.

 

 

 

그의 생각을 누가 들어준 거기라도 한 걸까. 놀랍게도 데스페라도의 바램은 이루어지고 말았다.

매일은 아니었지만, 그 이름 모를 뱀파이어는 일주일에 한번 꼴로 데스페라도가 순찰하는 늑대인간들의 숲에 나타났다. 여전히 무언가를 찾고 있는 건지 숲을 돌아다니는 것 외의 수상한 짓은 하지 않았지만, 거슬리는 건 어쩔 수 없는 법. 그는 늘 다른 파수꾼들이 공격하기 전 그녀를 돌려보내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해야 했고, 그때마다 그 뱀파이어 여자는 즐겁다는 듯 미성으로 소리내 웃었다.

 

“어라, 또 만나네. 당신.”

 

도대체 뭘 찾으러 오기에 이렇게 먼지 나게 들락날락 하는 걸까. 죽든 말든 상관없는 목숨이라지만, 한번 제 상식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한 인물이다 보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만약 이 여자가 사고라도 치면, 그때 살려 보낸 자신의 죄가 되니까. 단지 그것 뿐. 절대 다른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다.

…라고, 데스페라도는 믿고 있었다.

 

“또 왔냐. 뭘 찾는 건데 도대체?”

“말 못해. 일족의 비밀이라. 아 걱정 마, 원래 잃어버린 걸 찾는 거지 훔치려고 오는 게 아니니까.”

“아 그래? 그나저나 오늘은 혼자인가?”

 

매번 그런 건 아니었지만, 그녀가 올 때는 대부분 곁에 말끔하게 생긴 남자가 함께 있었다. 첫 만남 때 목소리만 들은 그 남자는 그녀를 ‘엔’이라고 부르며 챙겨주었고, 그녀도 남자가 하는 말은 대부분 들어주거나 존중해주었다. 단순한 동료라고 하기엔 사이가 좋은데, 혹시 깊은 관계인걸까. 침입자에 대한 건 뭐든 알아야 속이 시원한 데스페라도는 그 남자에 대한 것도 늘 주시하고 있었다.

 

“응? 아아. 제너럴 말이구나. 오늘은 없어. 나 혼자 왔거든.”

“배짱도 좋군. 혼자서 적진을 올 생각을 하고.”

“괜찮아. 난 강하거든. 그리고 당신은 날 공격하지 않고 말이야. 제너럴은 걱정이 많아서 늘 날 과보호 하려고 하지만.”

“주종관계라도 되나?”

“아아, 그런 건 아냐. 애초에 난 아무나 물고 다니지도 않고. 제너럴은… 시종들이 있긴 하지만 안 데리고 다니고.”

 

시종이라고 하는 건 분명 흡혈관계로 만든 사역마를 말하는 것이겠지. 사역마는 대부분은 인간이나 짐승들이지만, 놀랍게도 그들 중에는 늑대인간도 몇 명 정도 존재한다. 피를 취하고 상대를 자신의 종으로 만든다. 그리고 그 목표에 자신들이 있는 한, 늑대인간이 뱀파이어를 좋게 볼 일은 없다고 봐야겠지. 대부분의 늑대인간들은 저런 의미에서 뱀파이어들을 혐오하기도 했다.

 

“주종도 아닌데 굉장히 챙기는 군.”

“응? 그거야 제너럴은 다정해서 나 같은 숙녀가 밖을 나돌아 다니는 걸 싫어하는 걸. 너무 신사라서 문제인거지. 그나저나 그게 그렇게 신경 쓰여? 나한테 그렇게 관심이 많은 줄 몰랐는걸.”

 

얄밉게 웃은 그녀는 장난스럽게 데스페라도의 어깨를 툭 쳤다. 부드러운 터치. 장난이라기보다는 집적거림 같은 행동에 그는 거부반응을 보이거나 인상을 찌푸리진 않았다.

 

“정말로 찾을 때 까진 계속 올 생각인가.”

“응. 중요한 물건이니까.”

“도대체 뭔데? 내가 찾아볼 테니 그만 좀 와줬으면 좋겠다만.”

“비밀이라 못 말한다니까? 그리고 이름도 모르는 상대에게 어떻게 뭘 부탁해?”

 

저 입을 확. 데스페라도는 습관적으로 손이 올라갈 뻔 했지만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데스페라도.”

“응?”

“내 이름이야. 그래서 뭔데 그래?”

 

그가 이름을 알려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여자는 깜짝 놀란 눈으로 보다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딱딱하고 사나운 남자라고만 생각했는데, 설마 이렇게 굽혀주는 날도 올 줄이야. 여자는 진심으로 기뻐하며 손을 저었다.

 

“데스페라도. 좋은 이름이네. 하지만 안 돼. 내가 알아서 찾아서 갈 테니까 신경 쓰지 마.”

“이 ㅆ….”

“어라, 욕은 하지 말고. 하지만 정말 알려주기 곤란한 걸. 동족의 유품이니까.”

“유품?”

“응. 그러니까, 우리가 알아서 할 게.”

 

‘바스락.’ 저 멀리서 누군가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린다. 접근방향을 봐선 아마 늑대인간이겠지. 여자는 데스페라도의 뒤쪽으로 시선을 던졌다가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

 

“방해꾼이 왔네. 난 갈게. 데스페라도. 다음에 또 보자?”

“…이름 막 부르지 마. 엔.”

“음? 아아…. 에소루엔이라고 불러. 그건 내 애칭이야. 본명은 이거.”

“그런 거였냐.”

 

아무 사이도 아닌 것처럼 이야기 하더니, 애칭으로 부르는 사이었나. 데스페라도의 머릿속에서 ‘제너럴’이라 불렸던 남자의 얼굴이 잠깐 떠올렸다.

 

“그럼, 진짜 갈게?”

“그래. 죽지나 마라. …루엔.”

 

어차피 아무나 줄여 부르는 이름이라면 자신도 줄여 불어도 되겠지. 데스페라도는 그녀를 멋대로 루엔이라고 칭했고, 그녀는 그래도 좋다는 듯 웃으며 사라졌다.

희미한 안개가 저 멀리 떠나갈 때 쯤, 제 뒤에서 나타난 블래스터는 코를 킁킁거리며 자신에게 물었다.

 

“뭐야, 벌써 갔어?”

“침입자 이야기면, 그래. 갔지. 쫒아냈으니 가자.”

“흐음.”

 

수상하다는 얼굴로 데스페라도를 본 블래스터는 제가 왔던 길로 그대로 돌아갔다. 짐작하건데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 챘어도, 믿을 만한 동료니 모른 척 해주는 거겠지. 데스페라도는 파수꾼끼리의 쓸데없이 돈독한 우정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자신이 설마 뱀파이어와 통성명을 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스스로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서, 그는 한참이나 헛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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