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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곳 / 워킹데드

대릴 딕슨×송 윤

*현대 AU

 

 

 

릭 그라임스는 침착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애썼다. 비록 눈앞의 남자-그의 친구이면서 가끔 카운티의 경찰서에서 쓰는 오토바이들이 망가질 때마다 부러 와서 맡기는 실력 있는 정비사인 대릴 딕슨의 얼굴에 좀 지나칠 정도의 그림자와 먹구름이 엉겨 붙어 있다고 해도 말이다. 그보다 먼저 와 있었는지 저 구석, 피자 배달을 할 때 쓰는 제 스쿠터에 반 쯤 기대어 있던 글렌이 그런 릭을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는 그 얼굴을 보자마자 대체 무슨 일이야? 라고 물을 생각을 빠르게 집어던졌다. 글렌의 얼굴은 반 쯤 파르스름하게 질려 있었다.

 

“음... 좋은 오후야, 대릴. 맡겼던 오토바이는 좀 어때?”

“…거의 다 됐으니까 기다려.”

 

음울한 목소리가 조지아 주의 늦겨울 햇볕이 쨍쨍하게 내리쬐는 정비소 안을 울렸다. 그는 무슨 장마철 비만 줄창 와서 야구를 못하겠다는 어린 칼의 울상을 한 오 백 배 정도 더 끔찍하게 만들어놓은 것 같은 대릴의 얼굴을 보며 어, 그래… 하고 어물어물 말끝을 흐렸다. 대릴은 눅눅하게 잠긴 푸른 눈으로 릭의 얼굴을 쓱 훔쳐보더니 발목에 돌을 매달아 놓은 듯한 무거운 발걸음으로 안 쪽의 공구실로 사라졌다. 릭은 굳은 상태로 그런 대릴을 지켜보다가 잽싸게 발을 놀려 구석에 구겨진 글렌의 옆에 섰다. 대체 무슨 일이야? 하고 묻자 글렌이 구깃한 이마를 더 구깃하게 찡그렸다.

 

“아니, 대체 무슨 일 이길래 대릴 얼굴이 저 모양인데?”

“윤 때문이래요…”

“윤? 윤이 뭘 어쨌는데? 설마 대릴이 고백했어? 설마 차였어?!”

“…아오, 진짜. 차였으면 말도 안 하지!”

 

안 하지, 안 하지, 안 하지… 정비소 안쪽을 작게 울리는 메아리에 릭은 기겁을 하고 글렌의 입을 틀어막았다. 대릴이 들었다간 대체 이 작은 정비소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대릴이 대학의 겨울 방학기간 동안 이 작은 마을에서 지내는 자그마한 동양인 아가씨와 되먹지도 않게 간질간질한 기운을 타며 천국부터 지옥까지 하루에도 왕복으로 3천 번은 돌아다닌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그리고 릭 그라임스의 역사가 증명하건데 그런 상태의 사람을 건드렸다가 좋은 꼴이 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입이 틀어 막혔던 글렌은 그런 것은 신경도 쓰지 않는지 입을 틀어막은 릭의 손바닥 안에서도 읍읍 거리는 소리를 내며 팔을 휘둘렀다. 기세만 봐서는 정비소도 씹어 먹고 대릴도 씹어먹을 기세였다. 릭은 몇 번 헛되게 글렌을 좀 잠잠하게 하려는 시도를 했다가, 결국 공구실로 사라진 대릴이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글렌의 얼굴에서 손을 뗐다. 숨이 막혀서인지 그게 아니면 분이 치솟아서인지 시뻘겋게 달아오른 뺨으로 숨을 몰아쉬는 글렌을 보며 그가 이마를 짚었다. 좀 지나치게 늦된 첫 연애 직전의 상황 때문인지 대릴은 가끔 그러지 않아도 될 일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일 때가 있었다. 아마 이번에도 그런 상황이기 때문에 먼저 상황을 듣게 된 글렌이 이렇게 구는 거겠지. 그의 ‘꼬마 계집애’와 대릴에게 로맨틱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 이래로 대릴 근처의 사람들이 얼마나 대릴의 과대한 고민에 휘말려들었던가? 몇 차례 지인들을 뒤흔들었던 사건들을 떠올리며 그가 지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일단 진정해. 그리고… 그리고 대체 무슨 일인지 나도 좀 알자. 대체 뭐가 또 어떻게 됐길래 우리 미스터 센시티브Mr. Sensitive가 저러는 건데?”

“…발렌타인 때문에요.”

 

발렌타인? 얼떨떨한 그의 물음에 글렌이 콧등까지 와그작 구겨가며 발렌타인, 하고 대답을 자근자근 씹었다. 그러고보니 오늘이 발렌타인이기는 했다. 잠깐 지나쳐왔던 학교며 관공서도 빨간색과 분홍색으로 잔뜩 물들어 있었지. 의아한 얼굴의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글렌은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몇 번 숨을 몰아쉬더니, 곧 침착하게 걸어 제가 기대고 있던 구석자리 옆의 정수기에서 찬물을 몇 번 떠 마시고는 길게 숨을 내뱉었다. 손 안에 든 종이컵이 소리도 없이 쥔 주먹 안으로 구겨졌다.

 

“대릴이 초콜릿 코너에서 윤을 만났대요.”

 

릭의 표정이 점점 더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 찌그러졌다. 글렌은 그런 릭의 얼굴을 한 번 보고는 긴 한숨과 함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상황은 이러했다.

 

사실 냉장고에 무언가를 채워넣는다는 개념 자체를 잊어가기 시작할 정도인 대릴이 하필이면 발렌타인 전 날-그러니까 바로 어제의 마트 특설 초콜릿 코너 앞에 서 있었던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었다. 그건 일단 첫 번째로, 그 날이 대릴 스스로 이렇게 살다간 정비소에서 갑자기 엎어져 영영 못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느껴서 마트로 장을 보러 가는 몇 안되는 날이라는 뜻이었고, 동시에 마트에서 장을 보다가 발렌타인이랍시고 빨간색과 분홍색으로 알록달록하게 꾸며놓은 것을 보다가 저도 모르게 그의 ‘작은 꼬마 계집애’를 생각해버렸다는 뜻이기도 했다. UGA를 다니다가 방학 때가 되어서 비어있을 집을 돌봐줄 수 있겠느냐는 친구의 부탁을 받고 이 카운티까지 내려왔다는 조막만한 동양인 계집애는 단 것을 유달리도 좋아했다. 자그마한 초콜릿이나 사탕 같은 것을 보면 안 그래도 말간 눈동자를 반짝거리는 것이 그에게는 물어 터뜨리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워보였더란다.

 

사실 가장 큰 이유는 후자 쪽에 가까웠지만. 대형 마트답게 커다란 스피커에서 소 혀로 핥은 것처럼 미끈한 얼굴의 사내애들이 불러대는 사랑 노래가 울려퍼지는 가운데에서 그는 카트에 팔을 올려놓고 머쓱한 얼굴로 흰 바탕 위에 분홍색 하트 무늬가 잔뜩 달라붙은 플랜카드에 새겨진 황금색 글자들을 쭉 훑어보았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당신의 달콤한 사랑을 전하세요, 발렌타인이 당신의 사랑을 이루어 줄겁니다… 어쩌구 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총아들이 만들었음직한 문구가 줄을 이뤘다. 특설 코너로 큼지막하게 자리를 차지한 안 쪽에서는 어린 애들부터 나이가 지긋하게 든 노신사까지 여러 사람들이 들뜬 얼굴로 초콜릿이 늘어진 매대를 휩쓸고 있었다. 우습게도 이 나이 먹도록 사람 낯을 가리는 편인 대릴에게는 꽤 난관인 장면이었다.

 

물론 난관이 그것 뿐이었다면 다음 날의 글렌은 그렇게 고통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더 정확하게는, 그 난관은 사실 별 것 아니었다. 오래도록 난장판인 집안 사정과 형과 함께 했던 뜨내기 잡배 짓에서 벗어나 간신히 이 카운티에 정착한-그러니까 릭과의 주먹다짐부터 시작해서 많은 일들을 겪고 결국에는 이 곳에 정착한 탓에 연애라고는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던 대릴 딕슨이, 애틀랜타에서 이 시골까지 내려와 그에게 환하게 웃어주는 조막만한 계집애를 떠올리며 염병할 초콜릿 특설 코너 앞에서 머뭇거리던 그 순간까지는 사실 모든 것이 괜찮았다. 그는 잠깐 그 코너 앞에서 기웃거리다가 판매원의 의뭉스러운 눈길에 꽁지에 불이 붙은 듯 돌아서 떠나거나, 혹은 특설 코너에서 보이는 가장 화려하고 번쩍거리는 포장지로 싸인 초콜릿 한 판을 낚아채듯 골라 누가 볼 새라 계산대로 달려가거나 하는 둘 중 하나의 길을 선택할 수 있었다.

 

“-어라, 아저씨?”

 

특설 코너를 바라보던 어린 계집애들 중 한 명이 그의 ‘꼬마 계집애’ 라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분명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꼬맹이?”

“아하하, 여기서 만나네요. 장 보러 오신거에요?”

 

어, 아니 시팔 꼭 그런 건 아닌데. 그는 마른 입술을 간신히 혀 끝으로 축여가며 혀 바로 앞까지 밀려온 말들을 다시 목구멍 안 쪽으로 꾹꾹 눌러담았다. 눈 앞에 나타난 자그마한 소녀는 그를 보고 정말로 반가운 사람을 만난 것처럼 환하게 웃고 있어서 눈이 부시다 못해 따끔거릴 지경이었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웃지? 그는 욕설과 함께 치받아 오르는 의문을 땅 위로 뱉지 않으려 애썼다. 아니 시팔 진짜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예쁘게 웃는데? 특설 코너랍시고 마트 측에서 설치해 놓은 은은한 조명이 계집애의 머리카락에 하나하나 은은한 빛의 테두리를 두르고 머리채 끝에 물방울처럼 맺혔다가 자그마한 몸짓에도 산산조각이 나서 흩어졌다. 쟤 사실은 사람이 아니라 다른 거 아닐까? 천사 같은 거? 그는 매대에 머리를 처박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아내며 별 일 아니라는 듯 뒷목을 긁적거렸다. 손가락 끝이 자꾸 덜덜 떨렸다.

 

“뭐… 이대로 가다간 좀 뒤질 것 같은 느낌이라서. 너는? 너도 뭐 장 같은 거 보러 왔냐?”

“네에. 집은 마리안네 집이지만, 일단은 사람은 저밖에 없으니까요. 그저께 장을 안 봤더니 먹을 게 다 떨어져버려서…”

 

계집애-윤은 둥근 어깨를 한 번 으쓱 하면서 카트 쪽을 눈짓했다. 정말 똑, 떨어져버렸지 뭐에요. 하고 붙이는 뒷말에 웃음기가 잔뜩 붙어있었다. 그 목소리가 하도 달큰해 그는 조금 멍멍해진 채로 윤이 눈짓한 그녀의 카트 쪽과 제 카트 쪽을 저도 모르게 번갈아 몇 번 바라보았다. 냉동 식품과 맥주 캔들로 가득 채워진 그의 카트와는 다르게 계집애의 카트 안 쪽은 과채류나 빵, 혹은 면 종류 같은 것들이 담겨 있었다. 비쩍 마른 계집애가 살 붙는 건 안 먹고.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너무 퉁명스럽지 않을 정도로만 말 끝에 정을 내리찍어 둥글렸다. 아무에게나 날 서게 툭툭 말을 던지는 그였지만 윤에게만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넌 뭐 풀만 뜯어먹고 사냐. 비쩍 말라가지고.”

 

물론 워낙 말을 막하고 살던 놈이라 시도만 좋았을 뿐이었지만. 그는 정말로 매대에 머리를 처박고 얼른 좀 뒤졌으면 싶은 마음을 어떻게든 참아냈다. 계집애는 그런 그의 말에 눈을 한 번 둥글게 뜨더니 약간 난처한 얼굴을 했다.

 

“어, 그치만 고기는 지난 번에 허셜 영감님이 주신 게 아직 남아서요. 그거 마리안이 올 때까지 다 먹을 수 있을지나 모르겠어요…”

“그린 영감이? 아, 너 그 집 큰 딸하고도 친하다고 했지.”

“으응, 네… 역시 미국의 농장주라서 그런가 스케일이 다르달까… 그게 아니면 그냥 본인 손이 크신 걸지도… 아무튼, 고기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나중에 정 못 먹겠으면 아저씨한테도 나눠드릴게요, 하는 표정이 꼭 장난을 거는 어린 애처럼 천진했다. 그는 속으로 치미는 비명을 삼키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계집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동그란 두상이 손바닥 안 쪽에서 토닥토닥 소리를 내며 담겼다가 떨어졌다. 그의 어깨까지나 닿나 싶을 정도로 조그마한 계집애는 그가 머리에 손을 얹자 주춤 어깨를 떨었다가, 그가 쓰다듬기 시작하자 뺨 위에 복사꽃을 피우며 웃었다. 손 안 쪽으로 계집애 특유의 달큰한 향내가 가득하게 담겼다. 별빛을 부스러뜨려 만든 반짝거리는 웃음 소리가 살그머니 웅크린 어깨 너머로 터져나왔다.

 

“뭘 웃어, 임마. 애 취급 받는 게 그렇게 좋냐.”

“그치만, 아저씨가 이렇게 다정하게 대해주는 거, 전 정말로 좋아하는걸요.”

 

대륙과 바다를 한없이 건너야 하는 계집애의 나라에서는 이렇게 들큼하고 근지러운 말들을 하는 법을 학교에서 배우는 걸까?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를 향해 한 없이 꽃향기가 나는 예쁜 말들만 잔뜩 쏟아붓던 계집애는 제법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입만 열면 단 내가 폴폴 풍기도록 예쁜 말들을 했다. 계집애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우뚝 멈춘 채 대릴은 저도 모르게 그 위에서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어쩌면 이래서 앞에 있는 조막만한 계집애에게 푹 빠져버렸는지도 몰랐다. 오래도록 사람들의 배척하는 눈길이며 꽉 다물린 목소리들에 치여 살던 것이 그였으니까 말이다. 그는 처음 만났던 날 퉁명스럽게 굴던 제 눈을 보고 계집애가 웃으면서 했던 말을 기억했다. 저, 초면에 이렇게 말하는 게 실례가 될지도 모르지만. 가을도 훨씬 지나 겨울이 다 되었는데 뺨 위로 봄 꽃을 흠뻑 물들이고 말하던 소리. 눈동자가 꼭 별 같아요. 푸르고 반짝이는 겨울 별이요.

 

초면에 실례는 무슨. 그는 조심조심 그의 눈치를 보면서도 한가득 웃었던 그 날의 계집애를 떠올리며 설핏 웃었다. 그 말이 그저 저 조그만 계집애가 한 번 저를 보고 웃기만 해도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기분이 들게 만들었는데 말이다.

 

“…아저씨?”

“아무 것도 아니야. 그나저나 너 그거 다 들고 걸어 갈거냐? 팔 부러진다, 안 그래도 비쩍 마른 게.”

“자꾸 비쩍 말랐다구 하지 말아요… 아저씨만 그렇게 말하는거라구요.”

“얼씨구, 어떤 새끼가 너한테 안 말랐다고 하디? 눈깔 닦고 다시 쓰라고 그래.”

 

입술을 비죽거리던 계집애가 이마를 잔뜩 찡그린 그를 보고 꺄르르 한 번 웃었다. 그게 또 마냥 예쁘기만 해서 그는 부러 표정을 구긴 보람도 없이 픽 풀어버리곤 태워다 줄테니까, 하고 말을 꺼냈다. 자그마한 계집애 짐 하나 들어주는 거야 낡은 포드 트럭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계집애가 살고있는 그 동기의 집까지 데려다주는 동안 말도 제법 나눌 수 있을테니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계집애가 아저씨한테 늘 도움만 받아서 어쩌죠? 하고 그 예쁜 얼굴로 또 예쁜 말만 하면서 그와 함께 계산대로 갔더라면 정말 별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바로 다음날의 글렌은 고통받지 않았을 것이고, 대릴의 정비소는 2월 중순 늦겨울의 쨍쨍한 햇빛 속에서도 먹구름을 동반한 우중충함이 깃들지도 않았을 것이며, 릭이 당황하는 일도 없는 평화로운 카운티의 하루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생이 그렇게 호락호락 했으면 세상은 백 만 배 쯤 더 나은 곳이었겠지.

 

“어… 죄송해요, 저는 좀 더 살 게 있어서요, 그러니까…”

 

어색한 표정이 향하는 쪽은 초콜릿 특설 코너였다. 그러니까 대릴이 여기서 가장 값 나가는(적어도 그런 것처럼 보이는) 초콜릿을 집어들고 계산대로 뛰어갈까 고심을 하던 그 특설 코너. 달콤한 초콜릿으로 사랑을 전하라는 그린 듯한 자본주의적 표어를 내건 특설 코너를 향해 닿는 안절부절한 표정을 보며 그는 침착하게 한 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계집애가 단 걸 좋아하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정비소 한 켠에 놔둔 A*C 초콜릿 바구니가 누굴 위한 것이겠는가? 그런데 왜 갑자기 이렇게 어색해하지? 계집애의 작고 흰 손가락이 곰질거리는 것을 보던 그가 순간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눈을 크게 떴다. 설마.

 

“…뭐… 따로 줄 놈이라도 있어서 그러냐…?”

“네?! 어, 음, 그러니까…”

 

아냐 시팔 없다고 해, 없다고 하라고. 그는 티나지 않게 아랫입술을 덜덜 떨며 속으로 애걸했다. 그의 앞에서 자연스럽게 단 것들을 찾거나 사던 계집애다. 새삼 어색해 할 것도 낯설어 할 것도 없었다. 그런 계집애가 특설 매장을 바라보며 굳이 어색한 표정을 짓고 그와 따로 떨어지려고 하는 것을 보면 이유는 단 하나였다. 누군가에게 줄 초콜릿을 사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것도 누군가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주기 위한. 그게 무슨 뜻이겠는가? 좀 전에 간신히 가라앉혔던 매대에 머리를 처박은 채 뒤지고 싶은 욕구가 다시 스물스물 기어나왔다. 아니다, 매대는 조금 약하고 계산대에 들이박으면 뒤질 수 있지 않을까? 계집애의 흰 손가락이 다시 한 번 곰질거렸다.

 

솔직하게 따져 말해 보통의 사람이라면 처음 만났을 때부터 ‘눈이 예쁘시네요’라는 말을 붙이고 그 이후부터 쭉 어떤 로맨틱한 감정 교류를 해온 상대가 자기 앞에서 초콜릿을 사야한다며 우물쭈물했을 때 가장 먼저 튀어나오는 생각은 ‘그거 설마 내 거인가?’ 일 것이다. 온 마을에 쟤네 언제쯤 연애를 시작해서 사람들 복장을 그만 뒤집어놓을지에 대한 내기도 성행하는 사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여기서 안타까운 점은 대릴 딕슨이 오랜 시간 어딘가에 정도 못 붙이고 정감어린 눈길은 더더욱 받지 못한 채 살아온 자존감 낮은 남자라는 점이고, 대릴의 눈에 보이는 윤은 워낙 살갑고 다감해 마을 여기저기서 예쁨을 받는, 심지어 대릴보다 훨씬 어리고 똑똑하며 잘난 계집애라는 점이었다.

 

때문에 누구나 다 연인 직전이라고 생각하는 두 사람 간의 관계는 대릴에게 있어서는 여전히 짝사랑과 비슷했다. 그는 윤이 제게 보이는 어떤 호감도 반 쯤은 그녀가 아주 다정하기 때문이라고,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그게 대릴의 잘못은 아니었다. 대릴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감정 교류에 있어서 그 나이가 되도록 아직 어린 아이에 가까웠다. 가까스로 릭이나 캐럴 같은 사람들과의 동료애와 우정 그 사이의 어떤 것들에 대해서 맛 보았지만 연애 감정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물며 그 상대가 그의 눈에는 자신에게 넘치도록 아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해보라. 혼란스러운 대릴의 머릿속으로 주춤주춤 말을 뱉어내는 계집애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꼭 그런 건… 아닌데… 어, 그러니까. 한국에서는 발렌타인데이에 친구들한테도 초콜릿을 줄 때가 있거든요! 우정을 위한 초콜릿이라고… 그래서 그런 것도 있고…”

 

있고… 흐릿해지는 말 끝에 등 뒤에서 자꾸 식은 땀이 흘렀다. 그는 어떻게든 계집애의 앞에서 멀쩡한 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긴장으로 곱아드는 손 끝을 몇 번 쥐었다 폈다. 계집애는 말간 눈동자로 그의 얼굴을 흘끗 훔쳐보고는 고개를 살짝 오른쪽으로 기울였다. 처음 카운티에 왔을 때 보았던 머리 길이보다 길어진 머리카락이 그 몸짓을 타고 등 쪽으로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곱게 빚은 질그릇에 물을 한 가득 담아놓은 것처럼 물결무늬가 남아 반짝이는 눈동자가 또 한 번 힐끔, 그 다음에 또 힐끔, 하고 그의 얼굴을 훔쳐보았다가. 처음 만났을 때처럼 얼굴에 발갛게 봄 꽃을 드리우고.

 

“따로 줄 사람이 있는게 맞긴… 한데…”

 

그 순간 대릴 딕슨은 아주 침착하게 생각해버린 것이다. 계산대 모서리에 머리 쳐박고 뒤지자, 라고.

 

 

 

 

 

“…그거 대릴이잖아.”

 

안 그래도 불쌍하게 구겨진 글렌 손아귀 안 쪽의 종이컵이 다시 뭉개졌다. 상황을 보나 뭐로 보나 아무리 봐도 윤이 따로 초콜릿을 줄 사람이라는 건 대릴이었다. 아니, 대릴이 아닐 수가 없었다. 왜 대릴 앞에서 머뭇거렸겠는가? 왜 대릴을 보고 볼을 붉히면서 그런 말을 했겠는가? 다른 놈한테 줄 거였으면 윤이 대릴이 있던가 말던가 신경이나 썼겠는가? 릭은 친구의 바닥을 드러내는 자존감과 글러먹은 방향으로 씌인 콩깍지에 대해 통탄을 금치 못하며 고개를 저었다. 엉망진창으로 구긴 종이컵을 쓰레기통을 향해 던지며 글렌이 사나운 음울함을 감추지 못하고 웅얼댔다.

 

“한 시간 전에는 아예 이 정비소에 자기 무덤을 팔 것 같았다구요.”

“그 정도로 대릴이 눈치가 없단 말… 아니, 대릴은 그럴 수도 있겠군… 윤하고 그렇게 된 게 처음이지?”

“아니 처음이어도 그렇지, 그 정도로 티가 났는데 어떻게 이렇게 삽질을 할 수가 있어요…?”

 

릭은 차마 너도 매기랑 처음에는 그랬잖아, 라고 얘기를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보니 글렌은 이 정도로 삽질을 하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매기가 날 좋아한대요, 어떻게 걔가 그럴 수 있죠? 라고 새하얗게 질려서 그의 집을 찾아왔었지만, 어쨌든 글렌의 연애사는 적어도 대릴보다는 순탄했다. 적어도 글렌은 매기가 자기 자신보다 훨씬 더 나은 사람이며 자기는 매기의 그림자 끝자락도 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매기가 자기 앞에서 보이는 반응이 타인을 향한 것이라고 착각하지도 않았으니까 말이다.

 

“어찌됐던 간에… 윤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는데, 이건.”

 

옆의 글렌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대릴만 모른다 뿐이지 윤이 누구에게 초콜릿을 줄 것인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으나 그걸 얘기해준다고 해서 대릴이 믿을 것 같지는 않았다. 대릴의 낮은 자존감은 제법 뿌리 깊어 오래 알고 지낸 릭조차도 제대로 뿌리뽑지 못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2차적으로는 윤에게도 못할 짓이었다. 대릴에게도 숨긴 걸 보면 나름 깜짝 선물이나 고백을 의도한 것 같은데 그걸 고백 대상자한테 폭로한다니, 그런 피도 눈물도 없는 짓을 마을에서 소문난 바른 생활 청년 글렌과 민중의 지팡이인 릭이 할 리가 없지 않은가. 두 사람은 공구실에 처박혀서 나오질 않는 대릴을 생각하며 다시 한 번 연달아 쓴 한숨을 쉬었다. 정말 윤이 대릴을 찾아오기까지를 기다리는 수 밖에 없나 싶었다.

 

그리고 그들이 마음 속으로 언제든 좋으니 최대한 빨리 윤이 대릴의 앞에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란 바로 그 순간.

 

“저어, 아저씨 계세요… 어라, 릭? 글렌?”

“윤!”

 

품 안에 종이 쇼핑백을 하나 안고 들어온 소녀는 시커멓게 우중충한 얼굴로 몰려있다 제게로 쏟아지는 눈길이며 목소리에 놀랐는지 움칠 뒷걸음질을 쳤다. 글렌은 그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지(세 시간 동안 대릴의 기분을 어떻게든 원상복귀 시키려고 해서 그런걸까. 릭은 그렇게 생각했다.) 후다닥 뛰어나가 윤의 손을 잡아 끌었다. 자기도 모르게 모든 일의 알파이자 오메가가 되어버린 소녀가 오늘따라 좀 지나치게 저를 반기는 글렌을 보며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정통으로 마주보게 된 릭은 마음 속으로 침착하게 사과를 건냈다. 미안, 윤. 그런데 지금 공구실에 박혀있는 대릴이 상태가 너무 심각해서.

 

“대릴 만나러 온 거야?”

“응? 어… 아저씨 만나러 온 거긴 한데… 너 오늘 나 너무 반기는 것 같다?”

 

흰 이마 위로 깊숙하게 주름을 잡으며 묻는 윤에게 글렌은 즐겁게 고개를 저어보였다. 고통과 고난의 시간-그러니까 오늘 말고도 그 전에 겪었던 이 쌍방향의 삽질 커플이 자신에게 고통과 고난을 안겨주는 시간이 끝날 것이라고 생각하니 미소가 끊이질 않는 모양이다. 릭은 그런 글렌의 팔을 약간 잡아 끌어 당황하는 윤에게서 떨어뜨려놓았다. 행복해 죽겠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사람 겁은 먹게 하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하는 카운티의 믿음직한 보안관보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윤이 고개를 기울이고 그를 향해 방긋 웃었다.

 

“좋은 오후야, 윤. 대릴은 공구실에 있는데… 좀 기다려야 할 걸.”

“내가 불러올까?”

“…글렌, 넌 일단 좀 진정해 봐.”

“그래 맞아, 넌 좀 진정해. 왜 그래, 대체? 매그한테서 벌써 초콜릿 받아서 이러는 거야? 아, 그리고 괜찮아요, 릭. 급한 일도 아니니까요!”

 

자그마한 동양인 소녀는 그렇게 말하며 그들이 서 있는 곳 반대편에 있는 빈 작업대에 엉덩이를 살짝 걸치듯 기댔다. 안 그래도 언제나 다감하고 잘 웃는 얼굴이었던 윤의 얼굴은 오늘따라 긴장 섞인 기대와 수줍음으로 반짝거렸다. 잘 빗어내려 앞으로 늘어뜨린 머리카락하며 빛을 머금은 흰 얼굴 위로 옅게 바른 장밋빛 립스틱이 때 이르게 핀 봄처럼 하냥 사랑스러웠다. 릭은 당장이라도 대릴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공구실로 내달릴 것 같은 글렌의 뒷목을 내리 누른 채로 능청스럽게 윤이 끌어안은 종이 쇼핑백에 눈짓을 했다. 여기저기 오토바이의 부품들이 너절하게 널린 정비소의 광경과는 달리 깔끔한 하늘색 스트라이프 무늬의 쇼핑백이 전등 불빛에 반짝였다.

 

“그거 말인데, 초콜릿?”

“네? 아, 이거, 음… 그러니까…”

 

불안함과는 조금 다른, 그러니까 기분 좋게 긴장한 듯 떨리는 눈길이 정비소 안 쪽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기웃거렸다. 릭은 어깨를 으쓱했다. 대릴은 공구실에서 뭘 생각하고 있는지 글렌이 지난 세 시간 동안 땅을 파는 대릴에게 들은 기나긴 이야기를 풀어낼 때까지 나오지 않았으니 괜찮을 것이다. 공구실로 향하는 복도와 릭과 글렌만이 남아있는 정비소 작업실 안 쪽을 웃을 때마다 도도록이 부푸는 눈 밑에 꽃물을 발갛게 물들인 채로 훑어보던 윤은 비밀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어깨를 움츠리며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에 빠진 어린 소녀의 등 뒤에서 햇살처럼 반짝이는 것들이 잔뜩 비추는 것 같아 릭은 저도 모르게 흐뭇하게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깨물었다.

 

“직접 만든건데… 아저씨가 좋아할까요?”

“대릴은 네가 줬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해 할거야.”

“아하하, 고마워요, 릭.”

 

좋아하지 않을 리가 없다. 어쩌면 카운티로 온 이후에 처음으로 대릴이 귀 끝까지 새빨개져서 말을 더듬는 장면도 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대릴에게 윤이란 오래도록 사람들에게 꺼려지던 시간들을 모두 지나 제 앞으로 온 하나의 별과 같았으므로. 릭은 무심결에 맥주잔을 앞에 두고 중얼거렸던 대릴의 말을 떠올렸다. 걔를 처음 만났을 때 말이야, 걔가 나한테 눈이 예쁘다고 말했을 때. 그 때 난 걔가 천사인 줄 알았어. 내가 너무 개같이 사니까, 나한테도 뭔가 세상은 좀 더 괜찮은 곳이고, 너도 그렇게 마냥 나쁘진 않은 새끼라고 말해주러 온 천사.

 

대릴이 고작해야 윤의 애매한 답변에 저렇게 골골거리는 건 반대로 말해 대릴이 그만큼 윤에게 감정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카운티에 정착한 이후로 대릴은 딱히 누군가에게 제 마음 속 추를 옮기지 않았다. 릭이나 글렌, 혹은 허셜을 비롯한 그린 농장의 사람들 같은 극소수의 사람들에게야 가끔 잠깐이나마 기대는 모습도 보여주었으나 이렇게 빠른 시간 안에, 그리고 이렇게 깊숙이 대릴을 뒤흔들기도 하고 행복하게도 만드는 사람은 윤이 처음이었다. 릭은 잠깐동안 어둑하니 먹구름이 낀 채로 비틀거리던 대릴의 모습을 잠시 잊고 그저 두 사람이 잘 되기를 빌었다. 그리고 어차피 두 사람이 이루어지면 저절로 해결될 문제이기도 했으니 크게 걱정할 필요도 없을 터였다.

 

“사실은 어제 아저씨랑 만났는데… 그 때 재료 사러 갔었던 길이었거든요. 그런데 아저씨가, 초콜릿을 사려고 한다고 말도 안 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따로 줄 사람이 있느냐고 물어봐서…”

 

아, 당황해서 줄 사람이 있다고 대답한건가. 옆에서 글렌이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웅얼거렸다. 하기야 그럴만도 했다. 초콜릿을 만들려고 재료를 사러 나갔더니 초콜릿을 줄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보라. 게다가 누구에게 따로 줄건지 물어보기까지 한다면 얼버무리기 위해서라도 그런 대답이 나올 수밖엔 없을 터였다. 윤이 민망하다는 얼굴로 뺨을 긁적거렸다.

 

“그래서 초콜릿은 잘 만들었어? 뭐 만들었는데?”

“별 거 없어. 내가 뭐 요리를 엄청 잘하는 것도 아니구. 그냥… 파베 초콜릿 같은 거? 아, 매그가 망한 건 너 준다고 냉장고에 쟁여놓더라.”

“뭐? 왜? 왜 망한 걸 날 줘? 나도 성공한 거 먹을래!”

“아니, 망한 것만 준다는 게 아니고…”

 

릭은 꼭 남매처럼 아웅다웅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배경음 삼으며 즐겁게 콧등을 긁적거렸다. 어쩌면 이 쯤에서 글렌과 함께 슬 빠져주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카운티의 오토바이는 당장 오늘내일 필요한 것도 아니었으니 대충 수리가 끝난 것 같아 보이는 글렌의 스쿠터만 끌고 얼른 나오면 될 것이었다. 대릴이 얼굴이 벌개져서 말까지 더듬는 장면이야 오래도록 기억에 남겨둘 장면이었지만 굳이 눈치없이 여기에 남아있을 만큼은 아니었다. 차피 어지간하면 술집에서 만난 대릴에게 자초지종 정도는 물어볼 수 있을테니까. 아직도 매기가 어떻게 나한테 망한 걸 줄 수가 있느냐, 아니 너는 그걸 말리지도 않았느냐, 하고 어린애처럼 투덜거리는 글렌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두드리며 릭은 웃음에 젖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하고 우리는 빠져주자고.

 

“윤이 대릴한테 고백하는 장면은 나름 장관이겠지만, 그걸 우리가 꼭 볼 것 까지는…”

“…누가 누구한테 고백을 해?”

 

작업실 안 쪽의 공기가 순간 얼어붙었다. 졸지에 남의 고백을 당사자에게 불어버린 꼴이 된 릭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날 것 같은 뻑뻑한 몸짓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깥쪽 뺨으로 가벼운 무언가가 바닥으로 툭,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시간마저 창백해진 것 같은 공간 안 쪽에서 글렌과 윤이 동시에 속삭였다.

 

“대릴…?”

“아저씨…?”

 

공구실에 갔었다는 것 치고는 손 안에 아무것도 든 것이 없는 대릴이 아연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처음 보았을 때 얼굴 위를 가득 덮고 있던 먹구름이며 음울함은 사라진 상태였지만 그 대신 하얗게 덮쳐오는 여러 의미의 경악이 그 위를 잔뜩 뒤덮고 있었다. 나이 든 사냥개를 닮은 움푹 꺼진 뺨의 얼굴이 릭을 쳐다보았다가, 글렌을 바라보았다가, 그대로 윤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마른 입술이 소리를 낼 것처럼 몇 번 열렸다가 그대로 닫혔다. 윤이 얼어붙은 상태 그대로 눈을 몇 번 깜박였다. 아저씨, 하는 속삭임이 굳어버린 공간 안에서 메아리 쳤다.

 

릭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글렌의 뒷덜미를 휘어잡았다. 뭐가 어떻게 됐던 간에 당장 여기서 나가야했다. 까딱해서 타이밍을 놓쳤다간 중간에 휘말려서 쓸데없는 우박을 얻어맞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자고로 고백하는 장면에는 주인공 둘만 남아있는 것이 옳다고 수없이 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충고해주지 않았는가. 얼빠진 얼굴로 입을 떡 벌리고 있던 글렌도 릭이 제 뒷덜미를 휘감아 잡은 순간 정신이 들었는지 기대고 있던 벽에서 몸을 떼어내며 허둥거렸다.

 

그러나 그런 시도가 헛되게도 그들은 정비소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몇 발자국을 떨리는 다리로 뗀 대릴이 그대로 뛰쳐 나오듯 급하게 윤이 앉은 작업대 옆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하필이면 문을 중심으로 둘 씩 갈라져 있었기 때문에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대릴의 옆을 그대로 스쳐 지나가야 했다. 더군다나 안쪽을 향해 몸을 돌린 윤과 그대로 마주 본 대릴의 얼굴이 사람 꼴이 아니었기 때문에 도저히 나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들은 결국 아주 조용히 숨을 죽였다. 반대편의 두 사람은 꼭 동상처럼 서로를 보고 있는 상태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대릴은 거의 탈수 직전의 사람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한 채였다. 손 거스러미를 몇 번을 뜯었는지 벌겋게 살결이 드러난 손가락이 손바닥 안 쪽으로 사라졌다가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던 윤이 다시 한 번 아저씨…? 하고 속삭였다.

 

“얼굴이… 어디 아파요? 아니, 괜찮아요?”

“너… 너… 따로 줄 사람 있다며.”

“-네?”

 

대릴이 마른 혀 끝으로 똑같이 마른 입술을 한 번 훔쳤다. 윤은 눈동자를 정처없이 굴리며 그를 향해 시선을 고정한 채 짤막하게 숨을 터뜨렸다. 대릴의 눈가 끝이 경련하듯 떨렸다. 따로 줄 사람이, 나한테는 알려줄 수가 없는 사람이. 유백색이 탁하게 가라앉은 푸른 눈동자가 바닥으로 떨어진 푸른 스트라이프 무늬의 쇼핑백을, 저를 찾아온 윤을, 그리고 다시 한 번 쇼핑백을 바라보았다. 말라 죽어가는 것 같은 얼굴을 한 대릴을 아연하게 쳐다보고 있던 윤은 그런 대릴의 시선을 쭉 눈으로 쫓더니 입술을 달싹였다. 설마, 하고 숨소리를 섞은 목소리가 땅바닥으로 녹아내렸다.

 

“아저씨, 설마…”

“너 분명 따로 줄 놈이 있다고…”

“설마 진짜 다른 사람한테 줄 거라고 착각한 거에요?!”

 

자그마한 손이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대릴의 양 팔을 움켜쥐었다. 얇은 티셔츠 위로 움켜쥔 손가락을 따라 주름과 그림자가 지도록 팔이 쥐인 대릴이 움칫 몸을 뒤로 물리며 말도 못하고 눈을 껌벅였다. 윤은 길을 걷다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얼굴을 한 채 소리가 좀먹힌 비명을 지를 듯 입술을 벙긋거렸다. 정말이지 소리만 튀어나온다면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대체 이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내가 그렇게 티를 냈는데? 아니, 역시 그 마트에서가 문제였던 걸까? 아니 그래도 내가 그렇게 티를 냈는데?! 말라붙은 혀 끝이 간신히 달싹거리며 살점을 긁어내리듯 소리를 냈다.

 

“…대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어요?!”

“너, 너 분명히 따로 줄 사람이, 그 때 나한테 그랬잖아.”

“아니, 당연히 아저씨죠! 내가 아저씨 말고 다른 사람을 좋아할 리가 없잖아요?!”

 

대릴이 순간 숨을 멈췄다. 맞닿은 시선이 물결조차 일지 않고 한없이 말갛기만 했다. 언제나 웃을 때면 발갛게 꽃물이 드는 눈가가 울 것처럼 가느다랗게 떨렸다. 아저씨, 하고 부르는 소리를 따라 팔을 움켜쥐었던 손 끝이 가만가만 움푹 패인 뺨 위를 다정하게 쓸었다. 언제나 다른 사람보다 체온이 낮아 서늘한가 싶었던 손이 피부 위에 닿을 때는 꼭 화상을 남기고 가는 것 같았다. 윤이 조그마하게 속삭였다. 아저씨.

 

“세상에서 제일 좋아해요.”

“꼬맹아.”

“정말이에요, 그 때 거짓말해서 미안해요. 그 때는… 그 때는 아저씨를 놀라게 해주려고 그랬는데… 그래도 정말이에요, 세상에서 제일 좋아해요. 아저씨만큼 사랑하는 사람은 없어요. 그래도, 정말이지, 내가 그렇게 티를 냈는데!”

 

대체 어떻게 아저씨 말고 나한테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착각을 할 수가 있어요? 늦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봄향기를 한가득 몰고 오는 웃음소리가 숨결 위를 따뜻하게 덥혔다. 한껏 휘어진 눈매 안 쪽으로 햇살이 부스러졌다. 대답이던 반박이던 무엇이 되었던 말을 꺼내야하는데 도저히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렇게 햇살같은 계집애가, 언제나 누구에게나 다정하기만 할 것 같던 계집애가. 그는 바싹 말라 아파오는 혀 끝을 잇새 사이로 몇 번이나 짓뭉개며 하고 싶은 말을 골랐다. 그럴 리가 없잖아, 라던가. 그게 아니면 넌 시팔 뭘 믿고, 라던가. 네가 티를 언제 냈어, 같은-아, 하지만 계집애만큼 제게 다가왔던 사람이 있었나? 언제고 부평초처럼 나돌던 그에게, 그 누가 이 자그마한 계집애처럼.

 

그래서 결국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로 그대로 팔을 뻗어 자그마한 몸을 끌어안았다. 코 끝과 가까운 목덜미에서는 따끈하게 덥혀진 달큰한 설탕과자 같은 냄새가 났다. 품 안으로 갑자기 이끌려와 갑자기 멈칫하던 흰 손이 조심스럽게 그의 뒷목과 등을 가득하게 끌어안고 도닥였다. 유리 종을 울리듯 나직하게 웃는 웃음소리가 귀 안 쪽으로 가득하게 고여 찰랑거렸다. 넌 지금 빌어먹게 후회할 짓을 하고 있는 거야. 어디로 닿을지 모르고 엉성하게 세운 날이 박힌 말인데도 계집애는 몸을 떨어뜨리지 않았다. 뒷목덜미를 덮은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헝클이는 손길만이 그 곳에 있었다.

 

“넌, 젠장, 넌 분명 후회할 거라고.”

“정말, 아저씨는 바보네요.”

 

유리병에 담긴 사탕이 굴러 떨어지는 소리, 어렴풋하게 들려오던 교회의 종소리, 어머니가 가끔 끌어올려주던 침대의 이불이 햇빛과 살결 내음을 풍기며 부스럭거리던 소리. 그가 알고 있던 그 어떤 사랑스러운 소리를 가져다 써도 표현하기 힘든 달큰한 목소리가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정말로 바보에요.

 

“내가 아저씨랑 같이 있는데 후회같은 걸 할 리가 없잖아요.”

 

 

 

 

릭은 침착하게 정비소의 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둘 만의 세상에 흠뻑 빠진 두 사람은 아마 그와 글렌이 밖으로 나갔는지 안에 있는지도 모를 것이다. 아니, 안에 있었던 걸 기억은 할까? 허탈하게 치밀어오르는 숨을 삼키며 그는 제 옆에 목덜미를 쥐어잡혀 질질 끌려오다시피 나온 글렌에게 사과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글렌이 윤을 여동생처럼 여긴다지만 두 사람만의 꽃잎 날리는 세계를 정통으로 본 것은 좀 힘들었는지 글렌은 안에서부터 맥이 죄 풀려 흐느적거리고 있어 어쩔 수가 없는 선택이었다. 그래도 그나마 내일부터는 대릴도 괜찮아질 것이고 온 마을의 복장을 득득 긁어대며 애매하던 두 사람의 관계도 확실해질테니 나쁘지는 않은 일이다.

 

…라고 생각했는데.

 

“음… 그러니까, 글렌…?”

 

한없이 순하게만 생긴 흰 얼굴 위로 짙은 그림자가 내려앉은 것을 보며 릭은 마른 침을 삼켰다. 글렌의 얼굴은 거의 윤이 오기 전의 대릴의 얼굴과 비슷할 정도로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꾹 다물린 잇새 사이로 폭풍전야같은 고요함이 머물렀다. 릭은 한 번 더 조심스럽게 글렌? 하고 말을 걸었다. 그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의 덩어리들이-한국어 욕설인 것 같은데-질퍽하게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한 시간 동안 땅을 파던 대릴의 우울함에 사방팔방 휘말리다 둘 만의 세계로 빠져버린 것까지 본 가련한 청년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릭. 자기도 고통에 휘말렸건만 어디다 하소연 할 곳도 없는 안타까운 카운티의 보안관보는 나직하게 흘러나오는 제 이름에 퍼뜩 어깨를 굳혔다. 언제 생겼는지 눈 밑의 그늘이 새까맣게 늘어진 글렌이 중얼거렸다.

 

“내일 술집에서 보죠.”

“아니, 글렌 너 술도 못 마시잖아.”

 

조심스럽게 걸어본 딴지는 걸리지도 않았다. 릭을 향해 한 번 돌아갔다가 다시 먼 허공으로 떠나는 시선이 한 순간 번득였다.

 

“대릴을 어떻게 할 수는 없으니.”

 

대릴 지갑이라도 죽여야지.

 

다음날이 되면 오늘의 행복을 바탕으로 글렌에게 뼛속까지 털어먹힐 대릴-과 대릴의 지갑을 애도하며, 릭은 침착하게 생각하기를 멈추기로 마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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