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비파 / 노래의 왕자님
미카제 아이×현비파
비파는 스위츠 가게에 산더미처럼 쌓인 초콜릿을 보았다. 가게에 처음 들어올 때부터 이미 초콜릿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발렌타인 데이를 기념하여 스위츠 가게에서 초콜릿 가판대를 넓힌 모양이었다. 왼쪽에 놓인 젤리와 사탕은 초콜릿의 산에 묻혔다. 초콜릿은 3단 가판대 5개를 가득 채웠는데 종류는 굉장히 다양했다. 편의점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밀크 초콜릿부터 시작해서 들어본 적 없는 해외 수입품까지 있었다. 비파가 고민하는 건 바로 종류였다. 아이가 본 적 없을 법한 것이 어떤 것인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스위츠 가게에 오기 전에 아이에게 한 번 물어볼까도 생각했다. 그 전에 친구들에게 말했더니 지금쯤 한창 스케줄 하느라 바쁠 터인 린에게서 전화가 왔다. 비이, 안 돼, 미쳤어? 발렌타인인데 연인한테 먼저 어떤 초콜릿을 줄지 물어본다고? 그런 로망 없는 발렌타인이 어디 있어?! 비파는 눈을 깜박였다. 통화 볼륨을 살짝 줄이면서 대답했다. 작년에도 비파는 아이에게 궁금한 스위츠가 있는지 물어봤다. 그 입에서 나온 스위츠에 초콜릿을 더해서 선물했다. 아이는 기뻐했고 같이 스위츠와 초콜릿을 먹었다. 사실 어떤 것으로 주던지 아이는 기뻐할 터였다. 비파가 주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 좋아. 여러 번 선물을 하면서 들은 말이었다. 그래도 아이의 의견을 반영하여 원하는 것을 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선물을 고르는 데에 있어서 적용되는 로망이라는 단어가 잘 이해는 되지 않았지만 비파는 린에게 잔뜩 혼이 났다.
린과 만나기로 한 건 오후 3시 40분이었다. 10분 전에 도착해서 스위츠 가게에 먼저 들어가겠다고 연락했다. 점원에게 특이한 초콜릿이 있는지 물어봤다. 위스키 봉봉은 술이 들어있어서 무리였다. 내년이면 성인이 되지만 아직 미성년자임에는 틀림없었다. 점원은 비파만을 보고 스스럼없이 추천해주었지만 역시 재고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위스키 봉봉을 앞에 두고 고개를 젓자 점원이 말했다.
“그럼 밀크 초콜릿을 녹여서 과일에 코팅을 해보는 것은 어떠세요?”
“코팅…이요?”
“판 초콜릿을 중탕하여 녹인 다음에 과일 위에 뿌리는 거예요. 달달한 초콜릿과 과일을 한 번에 맛볼 수 있는 만큼 인기도 높죠.”
비파는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이런 식의 선물은 지난 3년 동안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아이와 사귀기 시작하고 이제 3년인데도 이런 기념일 선물은 항상 고르기 힘들었다. 아이에게 주기 전까지는 단 한 번도 챙긴 적이 없었다. 매번 아이가 신기해할 만한 것을 찾다가 지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로 골랐는데 이번은 조금 다르게 주고 싶었다. 비파는 점원에게 중탕을 할 만 한 판 초콜릿을 부탁했다. 초콜릿을 챙겨서 나오자마자 린을 만났다. 린은 손에 든 봉투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비이, 벌써 골랐어?”
“판 초콜릿이야.”
“신기한 걸 찾는다고 하지 않았어?”
“그래서 내 손으로 만들어보려고.”
“그래? 내가 도와줄까?”
“고마워.”
린과 함께 집으로 가자마자 시간을 보았다. 아이가 도착하기까지는 아직 3시간 정도 남아있었다. 열심히 중탕하여 그릇 위에 정갈하게 올려둔 과일 위에 뿌렸다. 과일은 딸기뿐만 아니라 바나나, 귤 등 초콜릿과 함께 먹기에 좋다고 하는 것으로 골랐다. 린이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끝마쳤을 땐 아이가 돌아오기까지 30분이 남아있었다. 린은 현관 앞에서 부츠를 신고 비파를 보면서 한숨을 뱉었다.
“비이, 잘 들어.”
“뭘?”
“앞으로 발렌타인은 이렇게 챙기는 거야. 알았어?”
“매번 같은 패턴은 아이에게 신선하지 않을 텐데.”
“미카제 선배한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은 걸 알잖아. 비이가 준비한 것이란 사실만으로도 기쁘다고 말했을 것 같은데? 안 그래?”
“그렇긴 하지만.”
“잘 전해주고 나중에 톡방에 후기 남겨줘. 알았지?”
고개를 끄덕이고서야 린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현관을 나섰다. 비파가 거실로 되돌아왔을 때 밖에서 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법 당황한 듯 볼륨이 큰 목소리는 익숙한 이름을 외치고 있었다. 창밖을 내다보자 아니나 다를까 물빛을 닮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주방으로 바로 달려갔지만 도저히 1, 2분 내로 정리할 수 있는 분량이 아니었다. 초콜릿만 남겨두고 그릇들을 싱크대에 넣었다. 입에선 저절로 비명이 나올 것 같았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도 없었다. 현관에서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닫히고 들려온 목소리는 당연하게도 아이였다.
“비파, 앞에서 린을 만났는데 오늘 왔었…….”
“아이.”
중탕한 초콜릿이 남아있는 그릇을 손에 든 채로 그대로 멈췄다. 눈앞에서 아이는 목도리를 손에 들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서 눈만 깜박였다. 비파를 포함하여 주방의 상태를 보듯 아이의 눈동자가 좌우로 굴러갔다. 비파는 침을 삼켰다.
“린이랑 초콜릿 만들었던 거야?”
“…응.”
“그릇에 담긴 게 결과물이지?”
“응.”
“그건 왜 들고 있는 거야?”
“계속 실패해서 방금 전에야 겨우 만들었거든. 그런데 아이가 예상보다 더 빨리 와서 급하게 치우느라고.”
“잠깐만 기다려. 같이 치우자.”
아이는 다시 거실로 돌아가서 소파 위에 목도리와 코트를 걸쳐두었다. 주방으로 돌아오며 소매를 걷었다. 비파에게서 그릇을 받아들고 싱크대 위에 올려두었다. 아이와 함께 식탁 위를 적당히 정리하고 닦으며 비파는 눈을 연신 깜박였다. 분명 자신이 생각했던 이미지는 이게 아니었는데. 그냥 산 걸 주는 편이 나았나. 비파는 치밀어 오르는 한숨을 가까스로 삼켰다. 아이가 식탁 앞으로 다가갔다. 그릇 옆에 놓아둔 포크를 집어 들었다. 소매는 여전히 걷은 채여서 비파가 내려주었다. 초콜릿이 묻은 딸기를 찍어서 눈높이까지 올린 아이가 그것을 뚫어져라 보았다.
“아이, 뭔가 이상한 것 같아?”
“아니, 이거 중탕한 초콜릿을 코팅한 거지?”
“만들어본 적 있어?”
“내 데이터베이스에 있을 뿐이야.”
아이가 딸기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입술에 초콜릿을 묻힌 채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초콜릿 굉장히 잘 녹았네.”
“정말?”
“딸기도 새콤하고 맛있어. 신선도가 잘 유지되어 있는 걸 보니 유통된 지 얼마 안 된 것 같네.”
“마음에 들어?”
“응. 무척 마음에 들어.”
비파는 아이의 입가에 퍼진 웃음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러 모로 계속 고민했지만 역시 직접 만들길 잘 한 것 같다. 비파는 아이가 건네주는 바나나가 찍혀 있는 포크를 받아들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