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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 / 사이퍼즈

클리브 스테플×한여루×잭 더 리퍼

둘은 언제나 일이 먼저였다. 클리브든 여루든 서로에게 신경 쓰는 시간보다는 각자의 일에 집중할 때가 더 많았고 그로 인해 다투는 일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로의 관계가 조금 더 가까워지는 것도 없었다. 현실주의자들 같으니라고. 몇 없는 주변 사람들은 그들을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클리브는 여전히 취재하기 바빴고 여루는 마감과 동시에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그런 그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마감을 끝내고 얼마 쉬지 못한 채 카페로 기어 나온 여루는 평소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언제나 이곳을 찾는 사람들, 이 시간쯤이 되면 항상 찾아오는 햇빛, 그 사이에서 피어나는 각종 이야기들. 감각은 무언가 달라졌다고 쉴 새 없이 외쳐댔지만 정작 여루는 그것이 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다만 평소보다 사람들이 조금 더 들떴다는 사실만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왠지 본인만 모르는 거 같다는 자각이 들자 기분이 훅 가라앉은 그녀는 어차피 일에 관련된 것은 아니라면서 쓸데없는 고민을 털어버리고 다시 일에 집중했다.

 

또다. 오후 6시에 얼굴을 비치던 남자는 오늘도 빼먹지 않고 여루가 일하는 카페로 찾아왔다. 티 나지 않게 한숨을 쉬는 것조차 캐치한 그의 관심에 두 손 두 발 다 든 그녀의 태도는 거의 체념에 가까워져 갔다. 뭐가 좋다고 생글생글 웃는 걸까. 남자는 뒤에 기다리는 손님이 없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여루가 있는 카운터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으음. 괜히 뜸을 들이며 그녀를 쭉 응시하던 남자는 무언가 퍼뜩 생각난 듯 조금 더 몸을 기울여 그녀와의 시선 차이를 줄이려고 애를 썼다.

 

“있잖아요, 여루 씨. 좀 있으면 밸런타인데이인데 초콜릿 만들 거예요?”

“…밸런타인데이요?”

“아, 모르는 거예요? 여자가 사랑하는 남자에게 초콜릿을 주는 날인데.”

“예에…. 제가 조선 출신이다 보니, 모르고 있었네요.”

 

거절의 의미가 한 가득 담긴 말을 툭툭 내뱉는 게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싱글벙글 웃으며 여루를 쳐다보던 남자는 굳이 손을 뻗어 그녀의 옷자락을 붙잡아 자신을 보게끔 만들었다. 덕분에 수첩 위에 보기 좋게 직선이 죽 그어졌고, 그와 동시에 여루의 얼굴에 살짝 그늘이 졌다. 그것을 탁, 소리 나게 닫고 주머니에 쑤셔 넣는 행동을 보고 나서야 상황 파악이 되었는지 남자는 여태 잡고 있던 그녀의 옷자락을 천천히 놓아주었다.

 

“아, 이건 미안해요. 근데 뭘 그렇게 열심히 메모를….”

“이건 제 개인적인 사정 때문이고요, 이젠 본인 볼 일을 보시는 게 어떻겠어요?”

 

저도 이제 일에 집중해야 할 거 같은데. 문을 여는 소리와 함께 찬바람이 들어왔다. 남자는 그제야 멀찌감치 뒤로 물러나 그녀가 주문을 받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손목시계를 한 번 보더니 카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돌아볼 정도로 존재감을 과시했다. 내일 또 올게요! 다시 한 번 딸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찬바람이 들이닥쳤다. 창밖을 통해 그가 완전히 갔다는 것을 확인하는 여루를 바라보던 여성은 웃으면서 그녀에게 질문을 건넸다. 애인이에요? 그 말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름도 모르는 사람인데요.

 

 

아르바이트를 다 끝내자마자 연합을 찾아간 여루는 자신을 반갑게 맞이해주는 연합 사람들에게 고개만 살짝 숙여가며 트리비아를 찾아다녔다. 그녀를 보자마자 인사를 하는 것조차 잊고 초콜릿 얘기를 꺼내놓은 것을 보면, 오늘 카페에서 들은 ‘밸런타인데이’가 내심 신경 쓰이긴 하는 모양이었다.

 

“우리 아가씨가 좀 많이 급한가 봐? 날 보자마자 질문부터 던지는 걸 보면.”

“아, 죄송해요 트리비아 씨. 근데 제대로 알고 있을 사람이….”

“나밖에 없을 거 같다, 이거지?”

 

여루가 고개를 작게 끄덕이자 그녀는 가볍게 웃으면서 의자에 앉았다. 그 움직임을 따라서 근처에 있는 의자를 끌어다 앉은 여루는 트리비아의 말을 빠짐없이 적어 내려갔다. 근데 처음 하는 거라면 혼자 하기엔 힘들지 않겠어? 주제를 조금 벗어나는 대화도 나누면서 착실하게 정리하는 그녀의 행동은 수첩의 두 페이지 째가 채워질 때 즈음에 멈춰질 수 있었다.

 

수첩에 적힌 재료들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주친 것은 다름 아닌 클리브였다. 여루의 손에 들린 짐들을 가져가 열어보자 딱 봐도 초콜릿을 만들기 위한 재료들이라, 그는 괜히 기분이 좋아져 소리 없이 웃어댔다. 무슨 목적인지 뻔히 알고 있었지만 조금은 당황스러워하는 그녀의 모습이 보고 싶어 이게 뭐냐는 질문을 넌지시 던졌다. 하지만 대답은 생각과는 조금 다르게 흘러들어왔다.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초콜릿이라고 말한 그녀의 목소리가 계속 귓가를 맴돈다. 여루는 그런 그를 향해 이상하다는 듯이 살짝 인상을 쓰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금 있으면 밸런타인데이라고 들어서요. 사랑하는 사람한테 주는 거라고 하던데.”

“그게 맞기는 한데…….”

“에이, 그럼 된 거죠 뭐. 전 또 잘못 알게 된 건줄 알았잖아요. 이왕 만들 거 같이 만들래요?”

“누구한테 줄려고 나한테 그런 소리를,”

“제가 줄 사람이 당신 말고 또 누가 있겠어요.”

 

응? 다시 한 번 돌아오는 질문에 클리브의 말문이 막힌다. 얼굴에 조금 열이 오르는 기분이 드는 거 같기도 하다. 결국 그는 푸스스 웃으며 바람에 살짝 흩어진 앞머리를 정리해주었다. 그래, 같이 만들자. 뒤에 하고 싶은 말까지 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초콜릿 자체를 만드는 것은 생각보다 간단했지만, 컨디션이 따라주질 않아서 예상보다 조금 더 늦은 시간에서야 완성할 수 있었다. 두통 때문에 잠시 앉아있겠다는 연인-클리브-의 말을 대충 넘기고 어느 정도 자리를 정리한 후에야 그녀는 찌뿌둥한 몸을 풀었다. 그리고 하나로 묶어놨던 머리를 풀려고 뒤로 손을 가져간 순간, 제 손보다 더 크고 따뜻한 손이 겹쳐졌다. 끈을 잡고 아프지 않게끔 조심스럽게 내리자 모여 있던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퍼졌다. 고개를 돌려 얼굴을 확인할 새 없이 뻗어 나온 팔은 조리대를 잡아 반쯤 가둬지고 반대쪽 팔은 허리에 감겨 어디로도 물러서지 못할 처지가 되어버렸다.

 

“아, 잭. 왜 그래요 갑자기….”

“밸런타인데이, 누가 말해줬나?”

“그야…, 제가 일하는 카페에 맨날 찾아오는 남자손님? 그 사람이 가르쳐 줬는데요.”

“……설마 그 남자에게 줄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겠지.”

 

잭의 말에 여루가 가볍게 웃으면서 조리대를 받치고 있는 그의 손을 쓸어내렸다. 곧바로 나오지 않는 대답에 잭의 미간이 좁혀진다. 결국 허리를 감고 있던 팔을 풀고 그 손으로 그녀의 턱을 쥐어 자신과 눈을 마주하도록 돌려놓았다. 붉은 홍채가 좀 더 형형하게 빛나는 기분에 여루는 멋쩍은 듯이 웃으면서 제 턱을 잡은 그의 손을 붙잡았다.

 

“안 줘요. 오늘 만든 건 오로지 둘만을 위한 거니까.”

“어느 누구에게도 주지 마. 만들다 남은 거라도.”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여루를 본 뒤에야 잭은 느릿하게나마 그녀를 가두고 있던 팔을 풀어냈다. 하지만 여전히 살벌한 눈빛을 띤 채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게 신경 쓰이는 건지 그녀는 결국 조리대 한편에 밀어놓은, 아직 덜 굳은 초콜릿을 손가락으로 푹 찍어 그의 입가에 가져다댔다. 의미를 모르겠다는 잭의 표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 위를 손가락으로 살짝 눌러 초콜릿이 묻어나오게끔 만든 그녀는 살짝 웃으면서 제 손에 남아있는 초콜릿을 핥아먹었다.

 

표정 좀 풀어요. 여루의 입에서 나온 말에 잭이 헛웃음을 지었다. 이어서 들려오는 기분 안 좋을 때 단 것을 먹으면 좋다는 말에 웃음을 거두고 이로 입술에 묻어있는 초콜릿을 긁어 가볍게 음미했다. 나름 맛있는 건지 얼굴에 그늘이 지진 않는다.

 

“…썩 내키진 않지만.”

 

살벌한 빛이 수그러든다. 자신을 쳐다보는 눈빛이 조금은 부드러워지자 이제야 안심이 되는지 그녀의 표정 또한 아까보단 조금 더 편안해진 느낌이 들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느낄 수 없었던 초콜릿의 단 맛이 한 번에 훅 덮쳐온다. 하지만 불쾌하지는 않는 듯, 얼굴에는 각자 특유의 여유로움이 담겨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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