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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깽 / MCU

​스티브 로저스 드림

The day is all our own.

 

라스트 오브 어스 AU

 

 

문명과 인류가 사라질 때 낭만 역시 익사한 애틀란타에는 겨울에도 눈 대신 비가 내렸다. 춥고 습한 날씨는 딱 질색이었고 포장되지 않은 길을 걸어야할 때의 질척이는 땅은 증오스럽기까지 했다.그러나 때마침 우리는 지붕 아래, 벽 뒤에 머무르고 있었다. 게다가 식수가 떨어져가고 있었으므로 차가운 겨울비는 구원이라 할 수 있었다.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가지고 있는 보틀과 수통을 모두 앞마당에 내놓고 뚜껑을 열어제쳤다.

그 사이 스티브가 이웃한 집의 지하실까지 열심히 뒤지더니 커다란 양철통과 대야를 찾아내서 양 손에 들고 왔다. 우중충한 겨울비가 금방 끝날지, 건조한 바람과 태양 없이도 옷이 금세 마를지 의심스러웠지만 잠시라도 땀에 절은 섬유의 악취 대신 세탁세제의 향기를 맡고 싶었고, 처음 만나게 될 이들을 거지꼴로 대면하는 건 자존심의 문제였고, 무엇보다 스티브가 내일은 이 비가 그치리라 호언장담했으므로 우리는 배낭 속의 옷가지와 겨우내 제대로 벗을 일이 없었던 내의를 꺼내 모두 빗물 아래 모았다.

 

“들어가 있어. 감기 걸릴라.”

두 사람의 빨래감이 가득 찬 통을 껴안은 스티브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여정 내내 몸에 스며든 과보호에도 불구하고 나는 포치에 선 채 머뭇거렸다. 두 사람분의 빨래를 맡기는 것이 미안하기도 했지만 그의 시야에서 벗어나는 것이, 내 시야에서 스티브가 사라지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그런 생각을 눈치 챈 스티브가 배낭에서 모포를 꺼내 어깨 위로 둘러주었다.

 

“추우면 바로 들어가고.”

 

잠시였지만 가까워진 그의 단단한 얼굴을 올려다보며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1년간 여정이 시작된 후, 정확히는 나의 존재가치에 대해 들은 직후부터 스티브는 내가 아플까봐, 베이거나 감기라도 걸릴까봐 거의 편집증환자처럼 굴었다.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숱한 위험을 거쳐왔지만 확실한 건 스티브 로저스가 아니었다면 나는 캘리포니아 주 경계를 넘지도 못 하고 죽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미대륙을 횡단하는 동안 겪어야 했던 일들과 비교하면 그의 과보호는 지나친 구석이 있다. 완전히 끝장나버린 세상을 가로질러 2000마일 넘게 걷는 와중에도 그는 나를 병치레 잦은 어린아이마냥 돌봤다. 운이 좋을 땐 차를 탈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도로가 출근길 뉴욕 도로마냥-스티브의 표현이었다- 버려진 차로 꽉 막혀있거나, 가솔린이 없거나, 지나치게 망가졌거나, 너무 눈에 띄었기 때문에 우리는 주로 걸었다. 걷고 또 걸었다.

그 동안의 우리는 운이 좋으면 집주인이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 모를 빈 집에서 잠을 청하고, 운이 좋지 않은 대부분의 날들은 정부군과 감염자와 약탈꾼들이 득실거리는 도심지를 피해 험한 길에서 먹고 잤다. 들짐승이라도 발견한 날은 불에 그슬린 고깃점을 입에 넣을 때도 있었다. 또 어떤 날은 유통기한 확인은 커녕 부풀지만 않았으면 괜찮다 믿고 통조림으로 배를 채워야 했다.

그런 식사조차 캘리포니아를 벗어나자마자 세끼에서 두끼로, 그리고 최근엔 하루 한끼로 줄일 수 밖에 없었다. 이런 결핍과 빈곤 가운데서도, 스티브는 나를 형제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새끼고양이 다루듯 대했다. 그런 태도가 나 자신이 아닌 내 안에 흐르는 피, 유전자, 돌연변이 형질, 아니 뭐든 상관 없다. 하여간에 순수하게 나를 사랑해서 이토록 아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태도는 나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음악가들이 연인을 노래하고 ,시인이 사랑을 찬양하던 시대에도 사랑에 빠지기 위해서는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았다. 하물며 이 황폐한 세상에서 모든 것을 걸고 자신을 지키는 남자 앞에선 그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나는 담요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포치에 놓은 낡은 안락의자에 앉아 나의 보디가드인 전직 군인을 바라보았다. 내 보호자였던 메리골드의 말에 의하면, 스티브는 미 육군 대위였고, 군의 전설이자 영웅이었다고 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후 나는 곧잘 스티브가 머리를 짧게 깎고 정복을 입은 모습을 몰래 상상하곤 했다. 명예로운 군인이었던 스티브 로저스는 충성할 국가가 무너진 이후로 한동안은 무정부 상태에서 무력과 긍지로만 관철시킬 수 있는 자신만의 규칙을 지키며 살다가, 이제는 갓 스물을 넘긴 여자애를 중심으로 공전하고 있다. 나는 그 사실이 못 견디게 좋으면서 슬프기도 했다. 훈장을 주렁주렁 매달았을 가슴에는 더러운 수건이 대롱거리고, 적이 아닌 더러운 빨래더미와 사투를 버리고 있는 그를 바라보는 건 허망한 안락함을 느끼게 했다. 불을 피워 데운 물을 섞어도 분명 지금 같은 날씨에 물에 손을 담구는 게 좋을 리 없을텐데 그는 이마 한번 찌푸리지 않았다.

“안 추워?”

“추워.”

“그럼 내가...”

“거기 있어.”

나는 입을 다물었다. 스티브는 익숙한 솜씨로 가루 세제를 풀고, 더러워진 옷가지와 해진 양말 따위를 빨고, 헹구고, 물기 한 방울 남기지 않을 기세로 꽉 쥐어짰다. 한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고 깨끗한 물은 모조리 식수로 써야했으므로 그는 오랜 시간 손빨래를 해야 했다. 우리는 세인트루이스 이후로 속에 껴입는 셔츠조차 제대로 갈아입지 못 했던 것이다.

마침내 스티브가 소원하던 세탁 세제향을 간신히나마 풍기는 옷뭉치가 든 대야를 집어들고 집 안으로 들어가자고 말했을 때도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연기가 우리의 존재를 알릴 것이 신경 쓰이긴 했지만 동사보단 나았기 때문에 벽난로에 불을 피워 빨래를 널고, 빗물을 데워 충분하지는 않아도 대충이나마 몸을 씻은 뒤엔 이미 저녁 시간이 다 되었다.

혹시나 해서 지하실과 주방을 뒤졌지만 이미 폭도와 좀도둑, 난민이 지나도 몇 번은 지났을 빈 집들은 텅 비어 있었다. 쓸모 있는 것들은 생존자들이 쓸어가버린지 오래였다. 가득 찬 건 가솔린이 떨어져 버려진 차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도로뿐이었다. 갑작스러운 재난의 여파를 고스란히 간직한 풍경은 떨어지는 빗방울로 한층 더 을씨년스러웠다. 늘어선 차에 모두 탑승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살았었다니,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 과거였다. 과거 인류가 이 땅에 번영했던 흔적들은 녹슬고 망가진 채 남아, 사람들은 더 이상 자연사 박물관으로 공룡 화석을 보러 갈 필요가 없다.

우리는 창문마다 덧창을 닫아 걸고 출입문을 꼼꼼히 확인한 후 아껴두었던 스팸과 콩 통조림으로 식사를 했다.

“좀 이상하군.”

먼저 말을 꺼낸 건 스티브였다.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러게, 열흘째 생존자는 코빼기도 안 보여."

 

 

공기 중을 떠다니는 미세한 포자가 사람들을 미치게 한 이후로, 세상은 이전보다 단순해졌다. 안전한 곳에서 먹고 잠들며, 살아남는 것이 전부가 되어버린 일상은 인류를 철저하게 해체시켰다. 적은 포자와 감염자뿐만이 아니었다. 서로가 서로의 적이었기 때문에 잇자국이 없는 생존자를 보면 반가움을 표시하는 건 사람들이 미치기 시작한 극 초반의 이야기였다.

때문에 우리는 캘리포니아에서 애틀란타까지 오는 내내, 한겨울 먹이를 구하러 굴을 빠져나온 산토끼처럼 조심했다. 실제로 끔찍한 일도 여러 번 겪었다. 터지는 뇌수와 피웅덩이를 딛고서야 빠져나올 수 있는 그런 종류의 끔찍함이었다.

그러나 질병통제예방센터를 목전에 둔 지금은 과거 도심지였던 지역으로 진입할 수 밖에 없었고 그 것은 필연적으로 폐허에 모여 사는 생존자들 무리 또는 약탈자들과 마주칠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조지아 주는 혼란의 시기 초반에 정부군으로부터 버려졌으므로, 과거 선벨트 지구로 분류되던 주 가운데 정부 주둔군이 없는 몇 안 되는 지역이었다. 비록 스티브가 기억하는 정부군과는 꽤 달라지긴 했지만, 어쨌거나 명칭은 정부군이었다. 정부군은 기존의 지역에서 민간인들을 통제하고, 파이어플라이를 색출해내고 감염자와 싸우는 것도 벅차기 때문에 초반에 버린 지역들을 수복할 엄두는 내지도 못 하고 있었다. 자연스레 이 근방은 민병대와 약탈자들이 기승을 부린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도 조지아 주 경계를 넘어선 후, 이상할 정도로 생존자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보통 이 정도 규모로 번성했던 도시에는 감염자와 생존자가 적당한 균형을 이루거나 어두운 골목과 콘크리트 숲 사이에 감염자가 득실거리기 마련이었다. 생존자가 우세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어쨌거나 이렇게까지 오랜 기간 다른 이들을 만나지 못 한 적은 없다. 제아무리 드넓은 구역에 숨어 살며 조심하더라도, 살아있는 사람은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었다. 과거엔 생명과 움직임이 넘쳐 흘렀기에 미처 눈치 채지 못 했던 흔적. 이 시대에서는 알지 못하는 타인의 흔적들을 발견하면 섬뜩한 기분부터 들기 마련이었으나 도시 전체가 텅 빈 무덤인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이 정도 규모의 도시에서 생존자를 한명도 볼 수 없다는 것은 기묘하고도 불길한 느낌이었다. 모두가 떠난 해변을 향해 우리 둘만 걸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수평선 너머에서 태풍이 돌진하고 있는 것도 모른 채.

내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는지, 스티브가 제 몫의 프레스햄을 나에게 밀어주며 안심시켜주려는 시도를 했다.

"괜찮아,내일 오후엔 CDC에 도착할 수 있을거야. 오늘 밤중에 비가 그치기만 한다면 말야."

스티브는 이 지옥에서 우리의 목적지인 미 질병통제예방센터가 마지막 남은 희망의 보루라고 굳건히 믿었다. 아니, 믿으려고 노력했다. 스티브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기에, 입맛이 없었지만 햄을 받아 들었다. 그러나 그 길고 고통스러웠던 여정의 끝이 보이는데도, 그도 나도 전혀 기뻐 보이지 않았다. 그 사실에 대해 우리는 입을 다물었다.

"오늘이 며칠이죠?"

나는 궁금하지도 않으면서 날짜를 물었다. 스티브는 왼손을 들어 손목에 찬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군인들이 흔히 차는 브랜드의 오토매틱 시계는 세계가 멈춰버린 직후에도 우리에게 문명과 역법의 흔적을 알리는 구실을 하고 있었다.

"2월 13일, 오후 7시 14분."

"내일이 발렌타인데이네."

내 말에 스티브가 씁쓸하게 웃었다. 확실히 포자가 뇌에 침투해 미쳐버린 인간이 인간을 무는 세상에서도 발렌타인데이를 떠올리는 내가 귀여워서 웃는 웃음은 아니었다.그렇다고 한심해하는 표정도 아니었다.

내가 시간을 물은 것은 다른 이유였다. 얼마 전 생필품을 보충하려는 목적으로 멤피스작은 마을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입구를 지옥견처럼 떠돌고 있는 클리커때문에 (스티브가) 고생을 좀 한 끝에 마트에 들어갈 수 있었고, 나는 거기서 아직 새 상품인, 반짝이는 손목시계를 찾았다. 비닐도 뜯지 않았으니 누군가 그 시계를 찬 채 못 박은 각목에 머리가 터지거나, 낫에 목이 베였을 거라는 찝찝한 상상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그 반짝임을 돋보이게 하기 충분했다. 내내 고민하던 발렌타인 데이 선물을 졸지에 한방에 해결한 셈이라 스티브 몰래 케이스를 열어보며 황홀해했다. 여행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러너로부터 나를 구하려다 유리에 금이 간 시계를 아직도 차고 있는 것이 마음에 쓰였기에 더욱 안성맞춤이었다.

내가 10살 생일도 맞지도 못 했을 때 세상이 끝장나버렸기에 누군가에게 로맨틱한 의미의 선물을 할 일이 없었다. 선물이라는 풍요롭고 이타적인 단어가 주는 기분은 몹시 낯설었다. 어쨌거나 나는 내일을 두 가지 의미로 기대하고 있었다. 더 이상 이정표도 없는 길을 끝없이 걷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희망과, 스티브에게 새 시계를 선물하고 그가 어떤 표정을 지을 지에 대한 기대감이었다.

기대, 우리는 그 부서지기 쉬운 감정을 품고 캘리포니아를 떠났다. 나는 억지로 스팸을 씹었다.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버려진 어린 남매처럼 껴안고 누웠다. 야외에서 보내야 하는 밤은 눅눅하고 추웠기 때문에, 또 내가 원했기 때문에 기온이 떨어진 이후로 매일 밤 그는 나를 안아주었다. 처음엔 심장이 뛰어 제대로 잠들지 못했지만 곧 스티브의 체온에 익숙해지고, 우리의 낮은 매우 피곤하고 힘들었기 때문에 오래지 않아 그의 품에 안긴 채로도 수월하게 곯아떨어졌다. 그러나 오늘은 아니었다. 빗소리와 알 수 없는 불안감과 기대로 쉽사리 잠들기 어려웠고, 나는 한참을 눈만 감은 채 시간을 보냈다. 스티브는 아마 내가 잠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뒤에서부터 끌어안은 손이 내 어깨를 더듬었기 때문이다.

가끔, 한밤중에 문득 잠에서 깨면, 스티브의 뭉툭하고 거친 손끝이 내 오른쪽 어깨 아래를 조심스레 어루만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마치 지금처럼...

나는 계속 잠이 든 척 할 수 밖에 없었다. 거기엔 어떤 성적 긴장도 없었다. 오히려 성물이나 성인의 조각상 발치에 입맞추는 순례자의 그것에 가까운 손길이었다.

그가 찾고 있는 것은 15개월 전 내가 감염자에게 물린 흉터였다. 여정의 혹독함은 영웅이었던 로저스 대위조차도,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은 사도 토마스마냥 내 흉터를 더듬으며 불면을 견디게 만들었다.

살점이 통째로 뜯겨져 나갈 정도로 난폭하게 물렸던 상처는 제대로 된 치료를 하지도, 할 생각도 없었기 때문에 내 팔에 국립공원만큼이나 넓은 상처를 남겼다. 사실 치료를 해서 무엇 하겠는가, 이틀을 넘기지 못 하고 나 역시 다른 감염자와 마찬가지로 침을 흘리고 팔을 허우적거리며 신선한 살을 찾아 헤매게 될 텐데.

늘 생각했다. 감염되면, 저들처럼 되느니 자살하겠노라고.

그러나 맹세는 쉽고 실행은 어려웠다. 그리고 깨달은 것은, 며칠이 지나도 나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야 물린 부위가 지독하게 쓰리고 아프긴 했지만, 3주가 지나도 나는 여전히 나였고, 내가 알기로 그 것은 포자 감염 사태 후 10년간 전혀 알려지지 도, 예외도 없었던 일이었다. 내가 아닌 내 항체의 존재가 여러 사람에게 희망과 기대를 선사했다. 그 중 가장 열렬한 신도는 메리골드였다.

내 어머니의 친구이자, 사춘기 이후 나의 보호자였고, 내게 생존스킬을 가르친 교관인 동시에 , LA를 주름 잡던 밀수꾼 메리골드는 바로 내가, 인류를 제대로 엿 먹인 감염 포자를 극복할 희망이라 믿게 되었다.

배급권에서 무기까지, 손 안 대는 물건이 없던 메리골드는 한때 과격파 민병대인 파이어플라이의 고위직이었기에 고급 정보와 그런 정보를 어디에서 얻을지에 대해 아주 훤했다. 메리골드가 내게 기척을 지우고 숨는 법이나 사격 대신에, 아직도 독자적으로 포자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는 정신 나간 또는 집념의 과학자들에 대한 소문을 알려준 것도 그 때였다.

그녀는 나를 파이어플라이 본부 연구소로 보낼 수도 있었지만 오래전에 자신의 소속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렸기에, 자신의 옛 소속 대신 간간히 아마추어 무선 방송으로 자신들의 생존과 포자 연구에 대해 방송하는 CDC를 선택했다. 과거 미 보건복지부 산하의 기관이었고, 현재는 소수의 인원이 남아 고립된 채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는 미친 과학자들에게 자신의 수양딸과 인류의 미래를 건 것이다.

 

그리고 만난 것이 스티브였다. 실전 경험이라고는 재빠르게 도망친 경험이 대부분인 여자애를 보호하며 생지옥을 뚫고 미국을 횡단해야 하는 그런 임무, 아니 임무도 아니었다. 스티브는 감염 여부도 확인되지 않은 민간인에게 발포를 명하는 정부를 위해 더 이상 일하지 않으므로 그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이는 없다. 그는 부탁을 받아들였다. 스티브는 나의 존재를 놀라워했고, 나를 바라보는 푸른 눈에 빛이 깃든 광경을 바라보는 것은 황홀하고 달콤한 일이었다. 스티브는 길게 고민 하지 않고 나를 CDC까지 보호하겠노라 맹세했다. 그가 나를 받아들인 것은 선한 의지와 다시 한번 이전의 세상을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나는 항체 연구 하나로 당장에 이 세상이 뒤집히리란 기대를 할 만큼 순진하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이 여정을 순순히 받아들인 것 역시 비슷한 이유였다.

내겐 10살까지의 기억이 있다. 배급권으로 썩기 시작한 감자를 받아 하루를 연명하고, 통행증 없이는 바로 옆 구역에 사는 친구의 집도 방문할 수 없는 삶 이전의 기억들.

기쁜 날에는 누군가와 선물을 주고 받고, 배불리 먹고 마시고, 아무 걱정 없이 펼쳐진 길의 끝까지 달음박질하던 기억, 그 때는 내일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다.

우리는 이제 그 길의 끝에 다다랐다. 그 과정에서 나는 기대와 희망보다 더 지독한 감정을 품고야 말았다.내가 그를 사랑하게 된 것은, 앞에서도 말했지만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우리는 숱한 밤의 한기를 이겨내기 위해 체온이 맞닿은 채 잠들고, 사계절의 밤과 낮을 함께 했지만 그뿐이었다.

그도 내게 사랑 비슷한 감정을 품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대답이 무서워 나는 한 번도 입 밖으로 소리 내어 그를 사랑한다 말한 적 없다. 도시를 떠난 후의 스티브는 생존해 포자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는 박사 양반들에게 무사히 나를 데려다주는 것이 지상목표였기에 나를 세 살 난 아기처럼 돌보고 보호했지만, 끊임없이 길을 걷고 살아남는 일로 머릿속이 가득 차 있어, 그 후, 연구소에 도착하면, 혹 우리가 실패했을 경우, 그도 아니면 포자와의 전쟁에서 승리했을 경우 그 수많은 경우의 수는 생각하지도 않는 것처럼 보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다다르자 나는 참을 수 없어져 나직하게 그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스티브?”

그러나 그는 대답이 없었다. 나의 군인이 잠이 든 것을 확인한 후에야 뒤에서부터 껴안은 손목을 더듬었다. 깨진 유리 표면이 사각사각 손가락 끝에 갉히는 감촉은 그 주인의 높은 체온만큼이나 익숙한 것이었다.

 

딱 한번, 그 것도 추수감사절을 기념하기 위한 알콜에 취해서였지만, 선을 넘을 뻔 한 적이 있긴 했다. 지척에서 숨결이 부드럽게 얽히고 내 등을 감쌌던 손이 머뭇거렸지만 뚜렷한 목적을 감은 채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늘 단정하던 그의 눈매가 약간 붉은 것은 분명 취기였다. 그러나 스티브에게 푹 빠져 있던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었기에 셔츠를 걷어 올렸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스티브가 내 팔을 잡았다.

‘미안, 안 돼. 이 건... 위험해...’

네게 부담 주는 일을 할 수 없다, 나를 꽉 끌어안은 스티브가 몇 번이고 속삭였다.그 목소리는 마치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나는 그가 말한 ‘부담’의 의미가 무슨 뜻인지를 알고 나서 알콜이 아닌 수치와 절망으로 얼굴이 붉어졌다. 스티브 로저스에게 나의 존재가 갖는 의미는 더욱 자명해졌다. 포자에 의해 변이되지 않는 유일무이한 존재, 스티브가 기억하는 세상을 되돌릴 수 있다는 조그만 희망이라도 줄 수 있는 사람.

그 뿐이었다. 심지어 우리는 키스조차 한 적 없다. 오직 보호자와 피보호자의 관계.

그 사실을 잘 알면서도 나를 위해 목숨을 걸고, 이상을 위해 마모되는 삶을 택한 그를 나는 끝끝내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내일 도착할 장소에서, 과학자들이 나의 존재 가치에 대해 엄숙한 선고를 내릴 것이다. 그 내용이 어떤 것이든 간에 그 뒤에도 그가 지금처럼 나를 지킬지, 그 것이 궁금했다. 무엇보다 밀수꾼이나 전직 군인이 아닌 질병통제예방센터의 의사들 역시 나를 희망이라 믿게 될지 불안감이 엄습했다.

테스트를 거친 후에도 나는 여전히 ‘쓸모’있을지... 생각이 복잡해진 나는 더는 버티지 못 하고 죽은 듯이 잠에 빠졌다.

 

 

다음 날 정오가 되기도 전에, 스티브의 장담대로 비는 그쳤다. 나는 오전 내내 가방 안에 손목시계에 생각이 머물렀다.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았다. 우리는 크래커와 치즈 스프레드로 식사를 마치고, 이렇다 할 대화도 없이 머물렀던 흔적을 정리했다.

그리고는 오랜 시간 호흡처럼 익숙해진 행군이었다. 스티브는 이미 몇 번이나 펼쳐봐 귀퉁이가 모두 날강하게 닳은 지도를 단 한번도 펴지 않았다. 머릿속에 지도가 고스란히 들어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지도는 10년도 전에 제작된 것이었으나 당연히 지금도 통용될 수 있었다.

“얼마나 남은 것 같아?”

“지금 속도로 간다면 2시간쯤.”

스티브가 헉헉대는 나를 위해 속도를 조금 줄이며 대답했다.

우리 팀의-단 둘 뿐이었지만- 리더인 그가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하고 싶어했기 때문에 우리는 평소와 다르게 휴식 없이 걸었다. 울창한 나무들이 우중충한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 자란 모습에도 불구하고 한 숨의 생기조차 느낄 수 없었다. 이 근방에 살아 움직이는 생물은 우리 둘 뿐인 것 같았다.그 증거로 새 우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정말 아직도 의사양반들이 살아 있을까?”

이어진 질문에 그가 걸음을 멈춰 나를 돌아보았다. 그런 질문을 하기엔 362일 또는 2500마일쯤 늦지 않았냐는 그런 표정이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해보였고 스티브는 대답 대신 내 손을 잡았다. 잡은 손에 전에 없이 힘주어 당기는 인력에 나는 속절없이 끌려갈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연구소가 가까워질수록 겁을 집어먹었다. 전날 밤의 비를 머금은 흙이 워커 밑창에 지긋지긋할 정도로 뒤엉켜 달라붙었다. 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엄습했다. 인구의 대부분을 광기와 죽음으로 몬 포자조차 어찌 못 한 내가, 냉혹한 겨울과 코 앞의 내 운명에 이처럼 무력했다. 냉혹하고 메마른 풍경에 나는 어릴 때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보았던 동부의 겨울 바다를 떠올렸다. 부모님은 단지 내게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려는 의도였지만 나는 캘리포니아의 해안과는 사뭇 다른 풍경의 겨울 바다가 영 낯설고 무섭기만 했다. 세찬 바람이 뺨을 스치고 회색 파도가 높이 솟구쳤다. 조금만 가까이 가도 저 바다가 나를 삼킬 것만 같은 공포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이 바로 그 때와 비슷한 심정이었다.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회색빛 풍경.

내 망설이는 발걸음에 스티브가 돌아 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괜찮아, 너한테 아무 일도 생기지 않게 할 거야.”

나에게 어떤 처분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지도 못 하면서. 나는 괜히 심술이 났지만 그가 거짓말 할 리 없다는 걸 알기에 묵묵히 걸었다. 아까부터 안개가 지독했다.

 

 

우리는 완전히 해가 지기 전에 클리프턴 로드에 진입했다. CDC는 연방정부산하의 기관이었고 바로 옆에 에모리 대학이 있었다. 그 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는가. 이 지역 전체가 망할 포자의 싱싱하고 젊은 배양기였다는 뜻이다. 사실 진작에 감염자 여럿이 튀어나와 덮쳤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스티브는 한참 전부터 글록 17을 꺼내 든 상태였다. 나는 야구 방망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내가 비 내리는 비포장 도로만큼이나 증오하는 것은 안개였다. 한치 앞도 보지 못 할 정도의 심각함은 아니었지만 시야가 방해받는 것은 질색이었다. 변이가 다년간 진행된 감염자들은 시각이 전혀 작동하지 않지만 대신 다른 감각이 극도로 발달해 있어 늘상 불리한 것은 인간이었다. 우리는 숨쉬는 것조차 잊을 정도로 청각에 집중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비스듬히 넘어가고 있을 해가 옅은 안개를 간신히 뚫고, 앞에 거대한 건물의 실루엣을 보여주었다.

 

언제나처럼, 징조를 먼저 눈치 챈 것은 스티브였다. 그는 군에서의 습관대로 주먹을 쥔 오른손을 들어 보이며 내 발을 멈춰 세웠다.

“이상한데.”

정말 이상한 것은, 스티브 로저스가 이상하다는 말을 이틀 새 두 번을 썼다는 것이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스티브의 점퍼자락을 붙잡으며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다 썼다.

“지나치게 조용하군. 그리고...”

한참만에야,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스티브가 걸음 속도를 조금 올렸기에 나도 덩달아 걸음을 빨리 했다. 사방이 무덤처럼 고요했다. 그런 지독한 침묵은 이 세상에서조차 익숙한 것이 아니었다. 심장이 쿵쿵 뛰는 소리가 퍼져 나갈까 두려울 정도였다.

스티브가 점퍼 주머니에 끼워둔 플래시를 켰다. 빛이 있으라.

희미한 안개가 걷히고, 우리는 바로 눈 앞에 당도한 거대한 건물을, 아니 건물의 잔해를 바라보았다. 단지 알 수 있는 것은, 지독한 화재가 있었다는 것 뿐이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맹렬하게 불 타올랐는지, 그 처참한 풍경만으로도 짐작 가능했다. 불은 모든 것을 태운 후 더 이상 소멸시킬 것이 없어진 뒤에야 꺼졌을 것이다.

우리는 뒤늦게 파티장에 도착한 고등학생 커플처럼 손을 꼭 잡은 채 허둥지둥 주변을 돌았다. 한참을 돌아도, 어디를 둘러보아도 무너져 내린 외벽과 터져나간 창과, 새카맣게 불탄 폐허였다.

“안 돼..안 돼..”

스티브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푸른 눈이 안개 속에서 충격으로 명멸했지만, 그는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그저 내 손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을 뿐이다. 아팠다.

건물은 완벽하게 소실되었다.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재와 그을음, 그리고 새카맣게 탄 시체뿐일 것이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고작 화재현장에 도달하려고, 불에 탄 시체와 콘크리트 더미를 보기 위해 여기까지 오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손을 놓았다. 스티브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도 듣지 못한 채, 터덜터덜 걸었다.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한참을 걷다가 발에 채이는 감각에 아래를 내려 보았다. 발 밑은 흰가운을 입은 남성의 시체였다. 나는 눈을 껌뻑거릴 뿐 놀라지도 않았다. 화재현장에서 도망친 것인지는 몰랐지만, 그의 면바지와 셔츠, 가운은 멀쩡했고, 사인은 확실했다. 손엔 권총이 들려 있었고 턱 위로 안면부가 날아가 있었으므로 자살이 분명했다. 사람들은 비슷한 이유로 다양하게 자살했다. 감염되었기 때문에, 지독한 고통을 견디지 못해서. 흔한 시체였다.

내가 되었을 수도 있는 죽음의 한 형태를 바라보며, 내 몸 속에 흐르는 피를, 눈에 보이지도 않는 항체인지 뭐시기인지를 저주했다.

그의 가운 윗주머니에 꽂힌 수첩을 꺼내 펼쳤다. 나는 화가 나 있었고 뭐라도, 내가 여기까지 온 이유를 아니면 오지 않았어야할 이유라도 찾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휘갈겨 쓴 수첩은 대체로 알지 못하는 용어들이었다. 날짜와 실험, 날짜와 실험,날짜와 실험...페이지를 넘길 수록 내용은 산발적이었고 개인적인 좌절과 분노로 가득했다.그리고 마지막 페이지...

-너무 늦었다, 너무 늦었다, 너무 늦었다, 너무 늦었다, 너무 늦었다, 너무 늦었다,너무 늦었다, 너무 늦었다, 너무 늦었다, 너무 늦었다, 너무 늦었다, 너무 늦었다, 너무 늦었ㄷ -

 

끝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그냥 털썩 주저 앉아버렸다.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흐느껴 울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끝났다. 내 존재 가치 같은 건 이제 영원히 알 수 없게 될 것이다. 무슨 상관이랴. 세상은 진작에 끝났는데. 그 사실을 깨닫지 못 하고 여기까지 온 우리는 한 쌍의 순진한 순교자였다.

어느새 다가온 스티브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목소리는 언제나와 같았다.

“돌아가자.”

나는 울며 웃었다.

“...어디로?”

그래, 정말로 어디로? 그 질문에는 스티브 로저스조차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어깨를 감싼 손을 통해 그의 난처함이 체온처럼 파고 들었다. 한참만에야 그가 대답했다.

“어디라도, 여기가 아닌 곳으로 가자. 여기 있을 순 없잖아.”

그가 내 겨드랑이로 손을 밀어 넣고 일으켰다. 안개와 눈물 때문에 시야가 온통 흐렸다. 나는 서러움으로 그의 손을 움켜쥐었다. 그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스티브, 옆에 있어 줄 거야?”

“그래, 언제까지나.”

스티브 로저스는 단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언제까지나.

그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눈물은 멈출 줄을 몰랐다. 우리는 방금 세상을 확실하게 잃었고 돌아갈 집은 오래 전의 과거에만 존재했다. 우리가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고 오직 앞으로의 시간만이 저주처럼 흘러넘쳤다.

스티브가 눈물이 재앙처럼 타고 흐르는 뺨 위로 천천히 키스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더듬듯이 입술로 옮겨왔다.

절망과 상실로 적신 그의 입술은 푸석했고, 짠 맛이 났다.

 

그렇게 우리는, 종말 위에 서서 첫키스를 했다. 그 것이 우리의 첫, 어쩌면 마지막이 될 발렌타인 데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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