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피스
릴리아 반루즈 드림
이건 백전노장으로서 말하는 것인데. 몇백 년을 살아가다 보면 알게 되는 진리 중 가장 으뜸 되는 것 하나를 꼽자면, 그건 바로 간절함만 있다면 어떤 최악의 상황에서도 타개책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릴리아 선배?”
여성복 전문점 앞. 진지한 얼굴로 원피스가 걸린 옷걸이들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릴리아는 뒤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혼자 쇼핑이라도 나온 거였을까. 사복을 입고 나타난 아이렌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릴리아는 때맞춰 나타난 이성(異性)의 후배를 반기며 상대의 팔을 잡아 이끌었다.
“아이렌이여! 마침 잘됐군, 나 좀 도와주겠나?”
“예?”
“옷을 고르려고 하는데, 고민이 되어서 말이야.”
그 말만 듣고 뭔가 큰 오해를 한 걸까. 갑자기 얼굴이 희게 질린 아이렌은 옷과 릴리아를 바라보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배가 입을 건가요?”
“뭐? 푸핫! 재미있는 농담을 하는구나.”
보통 이럴 땐 누군가에게 선물해주는 거냐고 물어볼 텐데. 이 후배는 편견이 없어도 너무 없는 게 아닐까. 릴리아는 그런 엉뚱한 반응조차도 귀엽다는 듯 소리 내어 웃고, 자세한 사정을 설명했다.
“고향에 있는 지인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보낼 거란다. 내 눈에는 어떤 것도 전부 다 예뻐 보이다 보니, 동성의 조언이 필요해서 말이네.”
“아하…….”
아이렌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행거의 옷들을 쭉 살펴보았다. 뒤적뒤적.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얼굴로 다양한 스타일을 살펴보던 그는 무언가 생각난 건지 눈을 가늘게 뜨고 릴리아를 마주 보았다.
“그, 실버 선배가 ‘어머니’라고 부르는 분에게 보내는 건가요?”
“이런. 들켰느냐?”
“그냥 넘겨짚은 건데, 맞나 보네요.”
과연 그럴까. 릴리아는 아이렌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어도, 상대가 보통 아이들보다 비범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눈치도 빠르고 직감도 좋으며 관찰력도 있는 이 후배는 자신과 실버의 관계도 금방 눈치챘고, 자신이 18살이 아니라는 것도 짐작해 냈으니까.
물론 그 와중에도 정확히 몇 살인지, 왜 이제야 입학했는지 같은 민감한 질문은 하지 않는 게 참으로 좋았지. 하여간, 릴리아에게 있어 아이렌은 꽤 믿음직한 후배였다. 때때로 몇백 년 살아온 자신마저도 뒷골이 얼얼할 만큼 초연한 모습을 보이는 건, 좀 오싹했지만 말이다.
“죄송한데 그분, 연령대가……?”
선물 받을 상대가 누구인지 알자 더 신중하게 고르고 싶어진 걸까. 아이렌은 좀 더 자세한 정보를 물어왔다.
“음, 나보다 조금 연하지.”
“……죄송합니다. 질문을 정정할게요. 외견상 몇 살로 보이나요?”
“이런.”
그렇게 나오겠다는 건가. 참으로 영민하기도 하지.
후배의 예리한 질문에 쿡쿡 웃은 그는 재치 있는 대꾸로 대응했다.
“그래, 자네보다 조금 나이 들어 보이지.”
“구체적이질 않네요.”
“후후. 하지만 외견상 나이가 중요한 건 아니지 않는가? 몇 살로 보이든, 언제나 귀엽고 정숙한 요조숙녀였는데.”
“실버 선배랑 비슷한 느낌이려나요.”
“오. 그럴지도. 물론 실버 녀석보다는 훨씬 조심스럽고 내향적이지만 말이야. 후후.”
이 정도 정보라면 충분한 걸까. 아이렌은 더 질문하지 않고 원피스를 골라냈다.
후배가 고른 원피스를 본 릴리아는 소리 없이 감탄했다. 통이 넓은 긴 소매와 프릴이 우아한 느낌을 주는 새하얀 원피스는, 확실히 선물 받을 이와 잘 어울릴 거 같이 보였다.
“그런데, 제가 골라줘도 되는 건가요?”
“음?”
“저라면 제 남자친구가 다른 여자가 골라 준 원피스를 선물로 주면 좀 찝찝할 것 같아서요.”
그렇게 말한 아이렌은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지만, 보아하니 묻는 말은 진심인 모양이었다.
그래. 보통은 이 후배의 말이 맞겠지. 하지만 릴리아는 그 걱정에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들 눈으로 보기엔 아이렌은 새파랗게 어린 핏덩이밖에 되지 않아 질투의 대상이 될 수 없었고, 결정적으로 이 후배는 다른 임자가 있지 않은가.
“글쎄다? 며느리가 골라 준 거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않겠나?”
“예?”
“후후.”
실버와 아이렌이 함께 하는 수많은 애틋한 순간을 떠올리며 웃은 릴리아는 후배의 손에서 원피스를 받아 갔다.
“괜찮으니 이리 주게. 로세우스는 그렇게 아량이 좁은 아가씨가 아니니.”
자신들은 사소한 일에 질투하고 시기하기엔 너무 늙어버렸으니, 정말로 괜찮다.
과거의 모든 걸 말해줄 수는 없기에 그저 상대를 치켜세우는 말로 상황을 얼버무린 릴리아는 후배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준 후, 카운터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