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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20 글과 이어집니다.

모자

실버 드림

“정말 받아도 되나요?”

“그럼! 내 쇼핑을 도와주지 않았나. 이 정도는 사줘야지 보답이 되지! 미리 받는 크리스마스 선물도 겸한다 치고 받아주게!”

“보답치곤 좀 거창하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늘 생각하지만, 자네는 검소하구먼. 후후.”

 

멀리서 들리는 대화 소리는 정겹고 익숙하다.

내일 있을 동아리 활동 때문에 마사(馬舍)에 다녀왔던 실버는 걸음을 늦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목소리가 들린 곳에는, 자신의 의붓아버지와 홍일점 후배가 사이좋게 걸어오고 있었다.

 

‘둘이서 같이 외출한 건가?’

 

그렇게 판단한 이유는 간단했다. 두 사람은 똑같은 쇼핑백을 들고 있었고, 들려오는 대화를 보면 따로 가게를 들린 것도 아닌 듯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저 두 사람이 같이 외출이라니. 이상할 건 없지만, 꽤 보기 드문 조합이지 않나. 게다가 분명 릴리아는 혼자 외출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어쩌다가 둘이서 다녀오게 된 걸까.

의아함에 계속 귀를 기울이고 있는 실버는 두 사람이 점점 자신과 가까워지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대화를 엿들었다.

 

“선배는 이대로 기숙사로 돌아가세요?”

“음. 선물을 포장해야 하니까. 자네는?”

“글쎄요. 별일 없으니까 아마 기숙사로 가겠죠?”

“그럼 가서 차라도 한잔 어떤가? 이왕 이렇게 만났으니, 이것도 인연이지!”

 

그렇게 말하는 릴리아는 갈림길 앞에서 멈춘 아이렌을 거울의 방 쪽으로 이끌었다. 그 모습을 본 실버는 조금만 더 걸으면 마주칠 정도로 가까워지기 전에 서둘러서 먼저 기숙사로 들어가 버렸다.

이유는 모른다. 제가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던 걸지도 모르고, 미리 들어가서 릴리아를 맞이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든 걸지도 모르지.

그렇게 명확하지 않은 감정에 이끌려 먼저 디어솜니아 기숙사로 들어온 실버는 제 방으로 돌아가는 대신, 출입문이 있는 복도에 서서 곧 들어올 두 사람을 기다렸다.

몇 분이나 기다렸을까. 릴리아와 아이렌은 나란히 기숙사로 들어왔다.

 

“다녀오셨습니까, 릴리아 선배.”

 

실버가 마치 우연히 마주친 듯 말을 걸자, 릴리아는 크게 반가워하며 제가 팔짱을 끼고 끌고 온 후배의 등을 떠밀었다.

 

“오, 실버여. 마침 잘 만났네.”

“예?”

“아이렌이 왔으니 담화실에 데려가서 차라도 내어주겠나? 둘이 이야기 좀 하고 있도록 하게. 나는 이걸 포장해야 해서.”

 

기껏 손님을 데려와 놓고 할 일을 하러 가버리다니. 그건,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 아닐까.

제 수양아버지가 자유분방한 면이 있다 해도 예의는 있는 걸 아는 실버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면서도 그 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릴리아에게 떠밀려 실버의 바로 코앞에 서게 된 아이렌은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실버 선배.”

“음. 좋은 오후다, 아이렌.”

 

이상하기도 하지. 분명 아이렌과는 전혀 어색할 게 없는 사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렇게 갑자기 단둘이 남겨지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멀뚱멀뚱 선 아이렌을 가볍게 위아래로 훑어본 실버는 상대를 담화실로 이끌어야 한다는 건 잊은 건지, 대뜸 손에 든 쇼핑백을 보며 물었다.

 

“릴리아 선배랑 함께 외출한 건가?”

“아뇨. 밖에서 만났어요. 전 산책 겸 나간 거였는데, 릴리아 선배랑 마주친 것뿐이에요.”

“그런가.”

 

역시 우연히 마주한 거였나.

여전히 쇼핑백을 바라보고 있는 실버는 아직 궁금한 게 많은지 질문을 이어갔다.

 

“그건?”

“릴리아 선배가 사주셨어요. 모자인데, 추울 땐 머리의 열을 보호해야 한다면서 이걸 골라 주시더라고요. 쇼핑 도와줘서 감사하다며 사주셨는데…….”

 

대답하는 아이렌의 표정이 썩 개운치 않다. 어딘가 멋쩍은 듯 웃는 상대의 표정을 읽어낸 실버는 다소 직설적으로 물었다.

 

“마음에 안 드는 건가?”

“예? 아뇨, 그건 아녜요. 전 작은 조언을 해드린 것뿐인데 이런 걸 받아도 되는 걸까 싶은 것뿐이죠.”

“아버……, 아니, 릴리아 선배는 충분히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해서 사준 걸 테니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본다.”

“그런가요?”

 

그런 조언 정도로는 충분치 않았던 걸까. 아니면 무언가 달리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 걸까.

여전히 명쾌하지 않은 표정으로, 아이렌이 쇼핑백 안을 힐끔거린다.

 

“근데, 제가 쓰기엔 좀 귀여운 모자인데.”

“……그런가? 어떤 모자길래?”

“어어.”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하던가. 아이렌은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 직접 모자를 꺼내 보였다.

 

“이거요.”

 

가방에서 튀어나온 건 흰색과 보라색이 섞인 털모자였다. 다만 보통 털모자와 다른 점이 있다면, 정수리에서 조금 떨어진 양옆에 동물의 귀를 연상시키는 장식이 있다는 것뿐일까.

개……, 아니, 이 둥그스름한 모양은 곰의 귀일까.

썩 앙증맞은 모자와 뚤어져라 보던 실버는 솔직한 감상을 전했다.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정말요?”

“응.”

 

오히려 왜 안 어울릴까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다. 아이렌은 여자치고 큰 편이긴 해도, 아직 16살밖에 안 되었고, 세벡처럼 커다란 것도 아닌데. 물론 이 후배가 나이에 비해서 지나치게 어른스러운 분위기인 건 자신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귀여운 모자가 안 어울리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모자를 내려다보는 실버의 눈빛이 너무 진지해서였을까. 아이렌은 저도 모르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써, 써볼까요?”

“……음.”

 

실버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딘가 미지근한 대답과는 다른, 참으로 확고한 의지가 느껴지는 몸짓이었다. 그 온도 차이가 재미있었던 걸까. 아이렌은 소리죽여 웃더니, 들고 있는 모자를 슬쩍 머리에 얹었다.

아, 역시 잘 어울리지 않나.

순식간에 곰 수인같이 변한 후배를 보며 저도 모르게 옅게 웃은 실버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입가를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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