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잠이 잘 안 드니?"
"네...어머님. 졸린 데 잠이 잘 안 와요."
"자장가라도 불러줄까?"
무릎을 베고 여느 때처럼 단잠에 들려고 하는 딸이 칭얼대자 청연은 쓰다듬던 머리카락에서 손을 떼고선 주취의 볼을 살짝 눌렀다. 주취는 까르르 웃더니 몸을 돌려 치마폭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도리도리 젓자 치마의 주름이 이리저리 이지러졌다.
엎드려서 숨을 쉬자 등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 얼굴이 눌린다고 차분히 타이르며 제대로 눕혀주는 청연의 손이 조심스러웠다. 바로 누운 아이를 살짝 들어 올려 자신의 몸쪽으로 끌어당긴 청연은 아예 주취를 품에 안고서 머리를 쓰다듬었다.
석양이 지는 바다의 물결을 연상시키는 구불구불한 머리카락. 다홍빛이 도는 투명한 붉은색, 바라볼수록 빠져들게 되는 선명한 눈동자. 또렷한 눈매를 따라 드리워진 긴 속눈썹. 높은 콧날 옆에는 활짝 핀 꽃처럼 생기가 도는 두 볼. 어린 아이의 사랑스러움을 담고 있는 앙증맞은 입술. 천천히 손끝으로 쓸어내리자 금세 또 졸려졌는지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길게 뻗은 속눈썹이 팔랑이며 눈동자를 드러냈다가 감춘다. 그 움직임이 점점 느려지자 청연은 옆에 치워뒀던 모포를 끌어당겼다. 흰 털이 마룻바닥에 쓸리며 모포가 얇은 옷을 입은 주취의 다리서부터 어깨까지 올라왔다. 무릎에 머리를 올려둔 주취는 갑갑하다고 했지만, 그 말을 하기에도 졸린지 모포를 밀어내던 손이 금방 힘을 잃고 바닥을 쳤다.
"좋은 꿈 꾸렴."
청연이 고개를 숙이자 머리카락이 주취의 어깨 위로 흘러내렸다. 이마에 포근히 입을 맞추자 주취가 푸흐, 하고 숨을 내쉬었다. 곧 잠이 들겠지 싶어 등을 톡톡 두드려주자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평소보다 오래 걸렸지만 역시나 금방 잠들어버린다. 한숨 돌린 청연이 쳐 두었던 장막을 걷어내자 저녁놀이 창을 넘어 스며들어왔다. 흰 모포를 물들이는 빛을 가만히 바라보다 팔을 뒤로 놓고 몸을 지탱하니 좀 노곤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일까, 잠시 눈을 붙이려는 걸 생각하며 하품을 할 때 말을 걸어온 주취의 목소리에 놀란 것은. 햇살에 눈이 부신지 가늘게 떴지만, 분명히 아직 잠이 들지 않은 모양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놀라고야 말았다. 숨을 헉하고 들이쉬고 천천히 내쉬었다. 평화로워진 일상에 적응하지 못할 때가 이런 경우다, 정말. 흩어진 소맷자락을 잡아당기는 주취의 작은 손을 겹쳐 쥐었다.
"어머님."
"왜, 나쁜 꿈이라도 꿀 것 같아?"
"으응...아니요."
"그럼 아직도 잠이 안 오는 거야?"
"으음...그것도 아니에요."
청연이 손가락을 뻗어 주취의 코를 살짝 튕겼다. 아무리 봐도 졸려보이는데 말이야. 잠이 오지 않느냐고 묻자 그건 또 아니란다. 꼬물거리는 손가락이 옷자락을 놔주지 않았다. 말해도 되는건지 안 되는건지 잠시 고민하는 모양이였다. 청연은 아무래도 상관 없어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러자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주취가 주먹을 꼬옥 쥐고서 진지하게 눈을 빛냈다.
"다음에는 비파를 켜주세요."
뜬금없이 건네진 말에 청연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주취는 한 번도 청연이 비파를 켜는 걸 본 적이 없을 텐데.
"누가 비파 얘기를 해줬니?"
"원 오라버니가요."
자원이가 해줬구나. 그 아이는 어릴 적부터 내 비파를 들으며 자랐으니.
"원 오라버니가 그랬어요. 어머님의 비파 솜씨는 나라 안에서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켜주지 않는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다음에 주취한테도 들려주고 싶어지면 켜주세요. 주취도 듣고 싶어요, 어머님의 비파."
청연이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자 주취가 스르르 눈을 감았다.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아까보다 깊게 잠든 듯했다. 청연이 깊은 한숨을 쉬고선 방 한구석에 시선을 두었다. 원래 청연이 황궁에서 쓰던 방에서 비파가 놓여있을 자리였다. 주취는 내가 비파를 켜는 걸 본 적은 없지만 들은 적은 있을 텐데 말이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생각했다.
상념에 빠져있던 순간 홍명이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왔다. 주취가 하는 말을 다 들었나 싶어서 청연이 멋쩍게 웃었다. 홍명은 따라 웃어주려다 한숨을 흘렸다.
"그러게 주취가 깨어있을 때 비파 연주 좀 하지 그랬어요."
"왜?"
"여전히 주취는 자기가 잠잘 때 듣던 자장가를 내가 연주한 줄 알잖아요."
"너도 켜기는 켰잖아."
"그래도 다르죠. 자원 말대로 당신 연주 소리가 훨씬 아름답잖아요."
깨어있을 때 들어야 하는데, 홍명이 중얼거리며 높은 선반에서 비파를 꺼내었다. 익숙한 느낌에 청연이 바닥을 톡톡 쳤다. 홍명은 그걸 보고선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가가 청연이 손을 놓은 자리에 앉았다. 눈을 살며시 감고 자세를 잡고는 켜는 모습이 조금씩 능숙해지고 있다.
"홍명, 비파 실력이 많이 늘었네."
"예전에 한 곡 밖에 못 켜던 거에 비면 나아지긴 했죠."
"그 곡은 네가 나보다 잘 켰잖아."
"당신이 좋아하는 곡이잖아요. 연습하느라 애먹었던 거 생각하면 지금도 딱 질색이네요."
홍명이 슬쩍 고개를 흔들었다. 청연은 미약하게 흔들리는 음을 잡아내고선 속으로 홍명이 더 연습해야겠다며 웃었다. 연습이 부족한가 봐, 입 밖으로 꺼내다가 말았다. 홍명이 먼저 말을 꺼냈기에. 뚝 끊긴 연주의 여운으로 떨고 있는 비파 현이 방 안의 공기를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이제 정말 안 켜요?"
"뭐를?"
"...비파."
"응. 안 켜."
뻔하게 비파에 대해 말하는 줄 알면서도 청연은 시치미를 뗐다. 홍명이 표정을 굳혔다가 직접 말을 꺼내니 그제야 대답한다. 미소를 띄운 채 무심하게. 그러자 홍명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한 번 더 물어왔다. 주저하는 모습이 자신이 이런 말까지 할 줄 몰랐다는 듯 항변하는 것 같았다.
"제가 켜달라고 해도요?"
"응."
망설이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자 홍명은 정말 풀이 죽었는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럼에도 청연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끌어당겨 어깨에 기대게 하자 순순히 끌려온다.
청연이 홍명이 기댄 어깨의 반대쪽 손으로 홍명의 다리를 토닥였다. 기분이 좋아 보이기까지 하는 청연이 미워 보였는지 홍명이 고개를 돌려 청연의 목덜미에 입김을 후우 불었다. 더운 입김이 여린 살을 간지럽히자 청연이 목을 움츠리며 홍명을 밀쳐냈다. 솜털이 곤두서는 느낌에 놀라 청연이 눈을 흘기자 홍명이 고개를 휙 돌려버린다.
청연이 한숨을 쉬자 홍명이 다시 청연을 바라봤다. 시선을 느낀 청연이 홍명을 마주 보고선 내심 놀라고 말았다. 시선을 피할 줄 알았던 홍명이 눈을 똑바로 마주했기에. 운을 떼는 홍명의 입이 천천히 청연의 마음을 울렸다.
"그 방에 가면 듣고 싶어질거예요."
"..."
이번에도 시치미를 떼려던 청연이였지만 입이 딱 달라붙어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무엇을 듣고 싶은지, 어디에 가는지 아무것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청연이 비파를 놔뒀던 방, 홍명이 일이 너무 많다고 투덜거리며 쉬려 들렸던 방, 잠시 쉬러 왔다면서 비파 연주가 끝날 때까지 떠나지 않았던 그 방. 홍명이 홍옥의 부름에 황제국에 돌아간다면 아마 그 방에 들리겠지.
"주취도 자고 있으니까 한 곡만이야."
홍명의 품에서 비파를 휙 뺏어들었다. 한숨이 잇새를 비집고 나왔지만 손에 잡히는 느낌은 청연에게 만족감과 안정감을 주기 충분했다. 놀란 홍명의 눈을 피해 슬쩍 눈을 감으니 손 끝에서부터 음악이 흘러나왔다. 처연하고 선명하게 색이 짙은 음색도 변하지 않았다.
눈을 감은 채 주변 소리에 열중하자 홍명이 차분히 비파 연주를 듣는 숨소리, 주취가 새근새근 내쉬는 숨소리가 들렸다. 방 밖에는 언제 온건지 자원은 문 앞에 서 있었다. 홍염과 홍패도 집 어디선가 지금 이 연주를 듣고 있을 터였다. 한결같이 모두가 기척을 죽여 적막이 드리운 집에 비파 소리가 울려퍼지니 청연은 나름 이것도 좋다고 생각하고 말았다. 적어도 지금만큼은 변하지 않고 청연이 사랑하는 모든 것이 곁에 있으니까.